HK(인문한국) 사업단 홈페이지

HK(인문한국) 사업단

웹진 문화로(文化路) 내용 시작

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화학자 보로딘의 교향곡 1번, 그리고 <쿠치키스트>
분류음악
국가 러시아
날짜2020-05-15
조회수638
첨부파일

<러시아 문화사 강의>를 저술한 니콜라스 르제프스키에 따르면 러시아 국민주의 음악은 현대 러시아 음악과 문화 역사상 가장 역동적이고 활성적인 시기였던 1860년대에 명확한 형태를 갖추었다. 그 이후 러시아 국민주의 음악은 ‘표제관현악곡’ 분야에서 큰 성과를 내면서 민족의 고유한 정체성을 음악으로 표현했던 19세기 후반의 국민악파의 전성기를 주도하였다. 이러한 국민주의 음악의 대활약으로 음악의 변방으로 평가되었던 러시아 음악은 세계적 수준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국민주의 음악의 중심에는 ‘민족적 색채가 짙은 음악’을 창조하려는 목적으로 뭉친 국민주의 악파 <힘찬 집단>(Могучая кучка), 즉 <5인조>가 있었다.

<러시아 국민악파 5인조>

<쿠치키스트>(Кучкист)로도 불리는 국민주의 악파 <5인조>는 ‘동시대에 평론가로서 민족주의 예술의 적극적 후원자’인 블라디미르 스타소프(В.В.Стасов)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그는 음악을 독학으로 공부한 젊은 남자들로 이루어진 작은 아마추어 음악 동호회 단체를 만들었다. 이 모임에 ‘러시아의 문화적 환경에서 흔히 폭군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거물’이었던 스타소프가 발굴한 25살의 밀리이 발라키레프(М.А.Балакирев), 27살의 체자르 퀴이(Ц.А.Кюи), 23살의 모데스트 무소르크스키(М.П. Мусоргский), 28살의 알렉산드르 보로딘(А.П.Бородин), 18살이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Н.А.Римский-Корсаков) 등이 참가하였다.

<쿠치키스트> 작곡가들 가운데서 보로딘은 가장 나이가 많았고, 화학자로서 전 러시아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는 특별한 인물이었다. 그는 31살의 젊은 나이에 자신이 졸업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의과대학에서 화학과 정교수로 발탁될 정도로 유능한 과학자였고 동시에 러시아에서 동양적 음악 양식을 실현했던 뛰어난 음악가였다.

            

화학자 보로딘, 그리고 음악

1833년 11월 12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보로딘은 음악에서 남다른 재능을 보여, 이미 8살 때 음악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플루트, 피아노, 첼로의 연주하는 법을 배운 보로딘은 작곡분야에서 타고난 능력의 절정을 보였다. 9살 때부터 작곡을 시작한 소년 보로딘의 작곡세계의 특징은 ‘인간의 내면의 세계를 시적’으로 표현하는데 있었다. 1849년에 제정러시아의 수도에서 발행된 유력 신문의 16살 보로딘에 대한 음악적 평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인간의 영혼을 아름답게 드러내는 전도유망한 작곡가 보로딘의 작품에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흥미를 보여준 비평가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섬세한 미적 취향과 시적 영혼을 구현하는 작곡 기법을 연마한 보로딘의 음악적 특이성에 환호했다. 왜냐하면 보로딘이 살았던 동시대 작곡가의 경력은 대체로 춤곡으로 알려진 폴카와 마주르카의 모방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화학자 겸 작곡가 알렉산드르 보로딘>

 
작곡에서 여느 음악가와 다른 행보를 보인 보로딘의 특별함은 ‘작곡하는 과학자’의 형상에서도 나타났다. 어려서부터 화학에 관심을 보인 보로딘의 방은 언제나 플라스크 등 화학실험을 위한 장치로 가득 채워졌다. 17살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의학-화학아카데미’에 입학한 보로딘은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젊은 나이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취득 후, 독일 하이델베르크로 연구연수를 떠났는데, 같이 동행한 젊은 과학자들 중에는 러시아 과학사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드미트리 멘델레예프(Д.И.Менделеев), 알렉산드르 부트레로프(А.М.Бутлеров), 이반 세체노프(И.М.Сеченов)등이 있을 정도로 화학적 분야에서의 보로딘은 러시아 과학의 자부심이자 영광의 얼굴들 중의 한명이었다. 

하이델베르크에서의 과학자로서의 삶은 엄청 바쁘고 힘든 것이었지만, 보로딘은 미래의 러시아 과학을 상징하는 동료들과 친밀하게 지냈다. 특히 화학에서 천재적 재능을 보인 젊은 화학자인 프세볼로드 사비치(В.П.Савич), 올레빈스키(В. Олевински), 멘델레예프와는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불행히도 사비치와 올레빈스키는 일찍 사망하여 ‘절친’을 증명할 시간이 없었지만, 보로딘과 멘델레예프의 우정은 평생 동안 남았다.

상기했듯이 하이델베르크에서 젊은 과학자들의 삶은 끝날 것 같지 않는 실험, 그로부터 발생하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당연히 스트레스가 많은 여정이었다. 그래서 실험실 활동에 질릴대로 질린 젊은 러시아 과학도들은 저녁마다 보로딘의 공간에 모여 ‘음악’을 통해서 스트레스를 극복하였다. 하이델베르크에서의 삶은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은 없었지만, 젊은 과학자들은 교향곡과 오르간 음악, 오페라 공연을 듣기위해 인근 도시로 여행을 자주 가곤 했다. 이 시절,  젊은 과학자 보로딘은 이미 여러 종류의 로망스, 악기 연주, 앙상블을 작곡하였다. 특히 보로딘의 피아노 곡 중 일부는 출판되기까지 하였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보로딘은 주로 실내악 앙상블, 피아노 트리오, 현악 4중주를 작곡하였는데, 이 곡들은 과학자 친구들 앞에서 시연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의 흥미를 끄는 사실은, 하이델베르크에서의 음악에 대한 보로딘의 애착, 보로딘의 음악의 결과물들이 빚어낸 소박한 성공은 보로딘의 인생에서 부차적인 것이었다는 것이다. 보로딘의 강한 열정은 여전히 화학에 집중되어 있었다.

화학, 음악, 친구들 속에서 보냈던 하이델베르크의 삶속에서 보로딘은 또 다른 중요한 인연을 만나게 되는데, 그 연분은 예카테리나 쁘로토빠포바(Е.С.Протопопова)였다. 쇼팽과 슈만의 피아노곡을 잘 이해하고 능숙하게 그들의 음악 세계를 연주한 예카테리나는 보로딘에게서 쇼팽과 슈만 같은 낭만파 작곡가들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시적 세계를 발견했다. 보로딘은 이 모스크바 출신의 젊은 피아니스트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녀는 나중에 보로딘의 아내가 되었다. 보로딘은 언제나 예카테리나의 피아노곡을 환희에 젖어서 감상했다고 한다.


<보로딘의 아내(예카테리나 쁘로토빠포바>
 

예카테리나가 건강상의 이유로 이탈리아로 갑자기 거처를 옮겨야 할 때 보로딘은 그녀와 동행했는데, 그녀와의 이탈리아의 생활은 보로딘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독일에서의 생활처럼, 이탈리아에서도 화학 실험실과 연구, 토론, 수업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보로딘은 예카테리나와 함께 음악회 및 오페라 공연을 자주 관람했다. 동시에 보로딘은 음악 작곡을 계속하였고, 그 보로딘의 음악은 아내가 된 아름다운 피아니스트에게는 ‘이탈리아 전체의 풍경을 밝게 비추는 태양 역할’을 했다. 예카테리나는 이탈리아에서 천재성을 지닌 남편으로부터 예술가의 숭고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발라키레프와의 운명적 만남, 그리고 교향곡 1번

1862년에 아내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보로딘은 <의료 아카데미>에서 부교수로  재직했다. 보로딘이 맡은 일은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한 피곤한 작업이었지만 토요일 저녁에 지인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정기적인 모임인 <토요일>(суббота)에 참석하기 위해 보로딘은 동료 겸 친구인 보트킨(М.А.Боткин)의 집에는 꼭 들렀다. 운명의 그 어떤 주말, 여느 때처럼 열린 <토요일>의 모임에서 보로딘은 자신의 음악 인생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제공하면서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인물인 발라키레프를 만나게 되었다. 스타소프와 함께 러시아 민족주의학파의 아버지 발라키레프는 <쿠치키스트>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의식적 러시아 음악을 안톤 루빈스타인과 음악원의 독일 심포지엄과 구분할 수 있도록 동양적 테마와 화음을 사용’하도록 권장하면서 ‘러시아의 동양적 음악 양식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러시아의 국민악파의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하였다.

<쿠치키스트>의 실제적인 리더와의 운명적인 조우, 그 이후에 자연스럽게 이어진 친교의 시간을 통해 이루어진 <쿠치키스트>의 다른 작곡가들과의 만남과 소통은 보로딘에게 자신의 음악적 재능에 대한 확신, 그 소질을 더욱더 발휘해야 한다는 진지한 열망을 갖게 만들었다. 발라키레프와의 친교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보로딘의 음악 인생은 다시 태어났을 정도로 발라키레프의 존재는 보로딘에게 강력한 흔적을 남겼는데, 그 결과 과거보다도 더 높은 수준의 독창적인 음악이 탄생하였다. 보로딘의 부인이 남편의 새로운 음악을 들으면서 경이로움과 존경이 생겼을 정도로 보로딘의 음악의 변화의 폭은 매우 컸다. 보로딘의 음악적 천재성을 알아차린 발라키레프가 보로딘을 음악적으로 완전히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었다.

낭만주의 시대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보로딘의 교향곡 1번(E♭장조/1862~67)은 심포니 창작의 필요에 대해서 보로딘에게 강청한 발라키레프의 직접적인 감독과 <쿠치키스트>들의 호의적인 음악적 친밀함에 영향을 받아서 작곡되었다. 보로딘의 첫 번째 교향곡 작업은 상당히 더디게 이루어져 총 5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작곡가의 ‘느림의 미학’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보로딘은 열정적으로 이 교향곡의 작곡에 임하였는데, 불행하게도 보로딘은 음악적 창작에만 전념할 시간과 여유가 없었는데, 이유는 화학과 그의 휴머니스트 성향 때문이었다.

화학과 음악으로 영혼이 뒤덮인 보로딘은 교향곡 1번 창작 당시만 하더라도 음악가 이전에 러시아의 화학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긴 화학자로서의 삶에 더 집중했다. 보로딘이 <쿠치키스트>의 모임 중간이나 모임 이후 서둘러 실험실로 내달아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만일에 당시 화학 연구에 필요한 러시아의 제반 환경이 최상의 상황이었다면, 보로딘은 화학 분야에서 더 큰 성취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그 당시 화학 실험실의 연구 환경은 전반적으로 썩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로딘은 러시아 과학 분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과학에 대한 보로딘의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은 사회적 활동으로 연결되었는데, 보로딘은  그 당시 러시아에서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의료학교’의 설립에 많은 공을 들였다. 이 학교의 설립과 존재는(비록 오랫동안 유지되지는 못했지만) 어디까지나 보로딘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보로딘의 교향곡 1번 음반>

휴머니스트로서의 보로딘은 가난에 쪼들린 중산층이었다. 아카데미에서 받는 보로딘의 급여는 작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보로딘은 물질적으로 그렇게 여유 있는 생활을 영위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수입의 상당 부분이 빈곤한 친척, 도움이 필요한 학생들 및 양녀(보로딘 부부는 자녀가 없었다)를 위해 지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지출이외에 보로딘은 실험실에서 항상 부족한 다양한 실험용 약물 구입 등을 자비로 구입하였다. 이런 식으로 지출한 금액의 규모가 커지니 보로딘의 가계 재정에 구멍이 생긴 것은 당연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 손실을 보전하기 위하여 보로딘은 살림아카데미에서 강의하기도 하고 때로는 과학적 문헌을 외국어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니 작곡에 전념할 시간을 갖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상기한 이유로 긴 창작과정을 거친 보로딘의 교향곡 1번은 1869년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쿠치키스트>의 다른 민족음악 작곡가들처럼 ‘서구 음악에 없는 파격적인 화성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러시아 민요의 성격을 반영한’ 보로딘의 첫 교향곡은 <쿠치키스트> 작곡가들이 획득한  첫 번째 빛나는 승리였다.  첫 번째 교향곡에서 거둔 대중적인 찬사로 인해 보로딘은 그의 창조적 재능에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이후 보로딘은 음악 창작과정에서 자신의 능력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품지 않았다. 자신감으로 충만해진 보로딘은 이국적 장식으로 가득하면서 동양적 흔적이 들어있는 음악적 멜로디로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쿠치키스트’작곡가들은 ‘민족주의 운동의 선봉에 서서 국민적 자부심과 일체감을 표현하고 당시 유럽 음악을 모방하느라 여념이 없던 러시아 음악계에 참신한 바람을 일으켰다. 러시아 전통에 뿌리박고 러시아 사람들의 정서를 음악으로 표현해낸 국민주의 음악가들에 의해 러시아 음악은 국제적인 수준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목록

웹진 문화로(文化路) 내용 끝

TOP

저작권 표시 및 연락처

06974 서울특별시 동작구 흑석로 84 법학관(303관) 1420호 / E-mail: fsicau@cau.ac.kr / TEL: 02-820-6355 / FAX: 02-822-00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