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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셰레메티예보 공항에서 푸시킨과 조우하다
분류대중문화
국가 러시아
날짜2020-05-01
조회수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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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이제 막 코로나가 러시아를 덮치기 직전, 운 좋게 모스크바 출장을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길에 공항에서 우연히 아는 남자(!)와 마주쳤다. 그의 이름은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

입국 당시에는 그가 그곳에 있는 줄도 몰랐다. 당시 우리나라는 한참 코로나 확산세로 인해 긴장 상태에 놓여있었고, 러시아는 한국에 비해 안전지대로 분류되어 있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사람이 많이 몰린 공항을 신속히 빠져나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주변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쌩하니 공항을 빠져 나와서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러시아 공항은 물론이요, 인천 공항에조차도 입국 통로 주변으로 시선을 끌 만한 것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던 중, 돌아가는 길에서야 그가, 푸시킨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셰레메티예보 공항 곳곳에서 푸시킨의 캐리커처와 그의 시가 담긴 화면이 송출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화면을 보자마자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푸시킨의 생년월일. 재빠르게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푸시킨은 1799년 5월 26일생으로 나온다. 그러고 보니 작년이 바로 푸시킨 탄생 220주년이었다는 생각이 퍼뜩 난다. 그럼 작년에 치렀던 행사의 연장인가, 아니면 작년에 제작한 홍보물을 계속 틀어주는 건가...? 당시엔 그저 그 정도로만 생각하고 말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는 러시아 정부가 해외 관광객들이 들고나는 공항을 중심으로, 그것도 출국 전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면서 공항에 머무는 틈새 시간을 파고들면서, 러시아에서의 좋았던 기억과 그 여운을 무의식중에 간직하도록 나름대로 상당히 전략적이고 알찬 문화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는 점에 새삼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내가 셰레메티예보 공항에서 푸시킨을 마주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러시아 정부에게는 이미 오래전부터 ‘계획이 있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셰레메티예보 공항 터미널 ‘D’에 설치된 푸시킨 송출 화면>

시간은 2018년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시아 정부는 2018년 11월 28일 자로 승인된 “국가에 대해 특별한 공훈을 세운 인물의 이름을 개별 지리적 시설에 부여하는 것에 관하여”라는 대통령령 제681조 1항에 의거, 이듬해 5월 31일 자로 유사한 차원에서 공항에도 국가에 공훈을 세운 인물의 이름, 소위 ‘위인’의 이름을 부여한다는 대통령령 제246조를 승인하게 된다.

해당 법안에 의거하여 셰레메티예보 공항은 ‘푸시킨 기념 셰레메티예보 공항’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고, 도모데도보 공항에는 ‘로모노소프(М. Ломоносов)’, 브누코보 공항에는 비행기 설계사 ‘투폴레프(А. Туполев)’라는 새로운 이름이 덧붙여지게 됐다. 그리고 각 공항에 부여된 러시아 위인들의 이름은 “러시아의 위대한 이름들(Великие имена России)”이라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실시된 인터넷 투표를 통해 결정되었다. 해당 경연을 통해서 총 32인에 달하는 러시아 위인의 이름이 44개의 공항에 부여되었으며, 그중 3개 공항을 제외하면 새 명칭을 부여받은 곳은 모두 국제공항이었다.

공항에 부여된 이름 중에는 표트르 1세(보로네쉬 체르토비츠코예 국제공항), 예카테리나 2세(크라스노다르 파쉬콥스키 국제공항). 비소츠키(마가단 소콜 국제공항), 멘델레예프(튜멘 로쉬노 국제공항), 체홉(유즈노-사할린스크 호무토보 국제공항), 아이바좁스키(심페로폴 국제공항) 등 귀에 익은 인물의 이름도 있지만, 세바스티야노프(소치 아들레르 국제공항), 쿠르차토프(첼랴빈스크 발란디노 국제공항), 포크리쉬킨(노보시비르츠크 톨마체보 국제공항)과 같이 다소 생소한 이름들도 눈에 들어온다.

러시아 일반 대중에게 익숙한 위인들의 이름을 국제공항 명칭에 새롭게 부여하여 친근감을 더하고, 동시에 러시아의 걸출한 인물을 대내외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일거양득의 효과는 ‘공항에 새로운 이름 만들어주기’ 프로젝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큰 장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행정적’ 혹은 ‘공공 외교적’ 차원에서의 장점과 별개로 이 프로젝트를 둘러싼 논쟁과 문제도 적지 않게 제기되었다. 왜 하필 푸시킨인가? 이미 푸시킨이라는 이름은,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성씨는 거리에서 광장에서, 연구소 명칭에서, 하다못해 지하철역 명칭에 이르기까지 모스크바 곳곳을 점령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셰레메티예보와 푸시킨은 또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가? 러시아의 또 다른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관문 ‘풀코보’ 공항은 어째서 명칭을 변경하지 않는가? 푸틴의 고향이기 때문인가?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심이 동요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가? 등등 여러 가지 문제와 논쟁이 수면 위로 떠 올랐다. 무엇보다도 이미 오래전부터 러시아 자국민은 물론 외국인들 사이에서도 ‘모스크바 국제공항’이라고 하면 마치 자동 공식처럼 ‘셰레메티예보’라고 대답하는 것이 일상화되어버린 상황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바꿀 것인가에 대한 문제 역시 제기되었다.

<푸시킨이 송출되는 셰레메티예보 공항 터미널 ‘D’ 탑승카운터 화면>


만일 그대로 공항 명칭이 개명되기라도 했다면, 마치 90년대 초반 러시아 내의 거리명이 모두 예전의 명칭을 되찾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혼란이 재연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만 해도 러시아 내에는 현재의 ‘얀덱스’ 택시 같은 시스템은 물론 영업용 택시가 거의 부재했던 탓에, 택시를 탈 일이 있으면 길을 오가는 일반 승용차를 향해 과감히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차를 세우고 가격을 흥정해서 목적지까지 가는 소위 ‘나라시’ 택시를 잡아타곤 했다. 그런데 택시를 잡다 보면 10번에 한두 번꼴로 자기는 처음 듣는 주소라며, 모스크바에 그런 이름을 가진 도로가 있었냐는 엉뚱한 대답으로 나를 당황하게 만드는 운전자들이 나타나곤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90년대 초에 러시아는 혁명 이전에 사용했던 원래 이름을 되돌려준다는 취지로 그동안 멀쩡하게 잘 사용되던 거리의 명칭을 그야말로 ‘뒤집어엎는’ 대대적인 작업을 시행했는데, 새로운 명칭을 미처 다 외우지 못한 채 여전히 예전에 사용했던 명칭에 익숙해져 있던 몇몇 사람들은 이로 인해 한동안 자기가 아는 주소임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주소를 찾기 위해 꽤 골머리를 앓곤 했다고 한다. 당시 내가 만났던 한 운전기사 분도 왜 멀쩡한 주소를 다 바꿔놔서 이렇게 내 삶을 복잡하게 만들어놓는지 모르겠다면서 연신 “쵸**!!, 쵸**!!”를 입 밖으로 내뱉으며 거칠게 액셀과 브레이크를 밟아댔던 기억이 난다.

당시 실시된 소위 ‘도로명 재정비’ 사업을 통해 ‘콤소몰’, ‘루나차르스키’, ‘마르크스’, ‘막심 고리키’, ‘마야콥스키’, ‘피오네르’, ‘인터내셔널’과 같은 소비에트적 색채가 짙은 명사와 이름이 거리명에서 제거되었다. 하지만 ‘푸시킨 거리’, ‘차이콥스키 거리’, ‘체홉 거리’와 같은 일반적인 명칭 역시 예외 없이 ‘볼샤야 드미트로브카(Большлая Дмитровка)’, ‘노빈스키 산책로(Новинский бульвар)’, ‘말라야 드미트로브카(Малая Дмитровка)’ 등 원래의 이름으로 되돌려졌다.

새로운 공항 명칭에 대한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셰레메티예보 공항은 계속 셰레메티예보 공항으로 남겨질 것이며, “그 어떤 개명 작업도 없을 것이며, 역사적으로 형성된 지리적 장소에 러시아 위인명을 붙이는 것”에 불과하다는 러시아 문화부 장관 메딘스키의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셰레메티예보 공항 측에서도 “기쁘게 설문조사 결과를 받아들이겠지만,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이라는 명칭은 이미 하나의 상표처럼 통용되고 있기에, 공항 명칭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는 자신들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고 나섰다. 실제로 푸틴의 서명이 첨부된 대통령령에 의거하여 44개의 공항에 위인명이 부여된 것이긴 하지만, 공항명 개명 자체에 관한 내용은 강제성이 있는 것이라기보다 ‘권고’에 가까운 성격을 지닌 것이기에 모든 공항이 설문조사를 통해 최종적으로 부여된 위인의 이름으로 공항명을 바꿀 필요는 없었다고 한다. 권고 차원에서 마무리할 일이었으면, 왜 굳이 대통령령까지 발동해서 이벤트를 벌여야 했었느냐는 의문이 살짝 들긴 한다.

여하튼 다행인지 불행인지 공항 명칭에 대한 대대적인 개명 작업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2019년 5월 31일 자로 셰레메티예보 공항에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시킨’이라는 이름이 공식적으로 하나 더 추가된, 혹은 수여된 것은 사실이다. 여전히 사람들은 셰레메티예보 공항이라는 이름을 습관처럼 더 자주 사용하게 되겠지만, 푸시킨과 그의 캐리커처는 셰레메티예보 공항을 대표하는 새로운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셰레메티예보 공항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하늘길 관문 중 하나이기에, 러시아인들이 푸시킨에게 보내는 열렬한 환호와 달리, 상대적으로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를 더 많이 알고 있는 외국인들을 상대로 이참에 푸시킨을 더 적극적으로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국민시인 푸시킨의 이름을 공항명에 수여된 것과 더불어 지난 2019년 6월, 셰레메티예보 공항 내 터미널 ‘Е’ 구역에 푸시킨 탄생 220주년 기념 푸시킨 동상이 함께 세워졌다. 그 외에도 공항 곳곳에 설치된 크고 작은 화면을 통해, 심지어 탑승 수속 카운터에 설치된 화면에서도 푸시킨의 캐리커처와 그의 작품 일부가 지속적으로 노출된다. 푸시킨이라는 성씨가 공항에 부여된 초창기에는 푸시킨의 시와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 형상이 그려진 ‘한정판’ 탑승권이 발행되었으며, 공항 내 커피숍과 매점 곳곳에 푸시킨의 대표적인 주인공 오네긴이 그려진 일회용 컵과 홍보물이 배포되었다. 일회용 컵과 받침에 그려진 QR코드를 핸드폰으로 인식시키면, 곧바로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 텍스트를 핸드폰에서 보여주고, 동시에 전문 성우가 해당 텍스트를 낭독해줬다. 심지어 셰레메티예보 공항 측에서는 정기적으로 푸시킨 관련 전시회와 문학 낭독회를 개최할 것을 약속했다고 한다.


<‘오네긴’이 그려진 일회용 컵과 텍스트 연결용 QR 코드>

 
한편 지난 2018년 새롭게 단장하고 문을 연 셰레메티예보 공항 내 또 다른 터미널 ‘В’에는 마야콥스키의 시가 쓰인 구조주의 형식의 벽이 세워졌다. 2020년 1월에 개장한 셰레메티예보 공항 터미널 ‘C’에는 ‘푸시킨 벽’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터미널 ‘С’에는 푸시킨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진으로나마 새로 문을 연 터미널 ‘C’를 확인해보니 비록 마야콥스키의 형상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소위 ‘마야콥스키 벽’으로 불리는 조형물을 제외하고는 전혀 미래주의적 색채가 느껴지지 않는 터미널 ‘B’보다 여러모로 마야콥스키를 더 많이 연상시키는 ‘미래주의적’ 스타일의 그래픽과 문구(полетели!), 우주비행사 그림과 우주선을 연상시키는 모형 등이 곳곳에 배치되어 현대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오히려 공항 내 터미널 ‘C’ 구역은 ‘푸시킨 벽’이 세워진 곳을 예외로 두고, 푸시킨이 아닌 마야콥스키에게 헌정하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푸시킨과 마야콥스키가 서로 경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푸시킨 공항이라는 명칭이 무색하지 않겠냐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러시아인들의 푸시킨 사랑과 별개로 공항 명칭을 둘러싼 의견과 논쟁이 참으로 분분하다.
 

<셰레메티예보 공항 터미널 ‘B’ 전경과 ‘마야콥스키 벽’>
 


<셰레메티예보 공항 터미널 ‘C’ 전경과 ‘푸시킨 벽’>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셰레메티예보 공항에서 푸시킨을 만났을 때 반가운 마음이 더 앞섰다. 물론 아쉽게도 내가 그를 만난 곳은 터미널 ‘С’가 아니라 터미널 ‘D’이다. 방금 인터넷을 통해 화려하고 현대적인 터미널 ‘C’를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다음에 러시아에 들렀다 나갈 때는 일부러라도 터미널 ‘С’에 들렸다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지난겨울, 셰레메티예보 공항 터미널 ‘D’ 곳곳에서 푸시킨의 자화상 캐리커처와 그의 시 구절을 눈으로 읽고 귀로 전해 들으면서, 잠깐이나마 뭔가 알 수 없는 아련함이 내게 밀려들었다. 그러더니 다음번에 방문하면 이번에 미처 가보지 못했던 장소를 꼭 가보겠다는 결심과 더불어 무의식중에 그 장소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하나씩 헤아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아마도 ‘러시아의 위대한 이름들’ 프로젝트를 고안한 담당자도 바로 이런 것을 노렸던 것이 아닐지…?

다음에 모스크바를 다시 찾았다 떠나갈 때는 또 어떤 모습의 푸시킨이 나를 배웅해줄지 벌써부터 자못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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