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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건강한 스포츠 정신, 라틔니나와 펠프스
분류기타
국가 러시아
날짜2020-04-01
조회수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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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과 올림픽 스타

1896년 4월, 그리스 아테네에서 제1회 하계올림픽대회가 열리며 시작된 근대 올림픽은 오늘날까지 124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그동안 세계는 총 31회의 하계올림픽을 치렀고, 각 종목 선수들이 쌓아온 무수한 기록들은 스포츠 발전의 새로운 역사를 끊임없이 써내려 왔다. 그런데 올해! 심상치 않은 코로나19의 확산 뉴스로 세계 스포츠계가 대혼란에 빠졌다. 세계 200여 개 국가에서 수십만 명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올림픽에 출전할 대표선수들까지도 속속 확진 판정을 받는 등 코로나19의 확산세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는 영향으로 결국 제32회를 맞이할 예정이었던 도쿄 올림픽은 연기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과거 1, 2차 세계대전 당시 6회(1916, 베를린올림픽), 12회(1940, 도쿄올림픽), 13회(1944, 런던올림픽) 대회가 취소되었던 적은 있었지만, 올림픽 역사상 대회 시기와 일정이 미루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익히 알려져 있듯이, 도쿄 올림픽 연기가 결정되기까지 일본 정부의 고민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미 세계 각지에서 코로나19 감염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급기야 그리스에서 성화봉송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던 3월 중순까지만 하더라도 일본 정부는 어서 빨리 ‘감염 확대를 극복하고 올림픽을 예정대로 개최하고 싶다’는 바람을 일관되게 이야기했다. 이처럼 쉽게 이해하기 힘들었던 일본 정부의 입장을 보면, 아마도 어떻게든 올림픽 개최 전까지 이 사태가 종식되기를 염원했던 ‘바람’, 그리고 곧 종식될 것이라는 희망찬 ‘믿음’이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간절했던 것이라 보인다. 이와 관련해, 세계 주요 언론은 일본과 IOC가 대회 연기를 쉽게 결정하지 못했던 이유에 대해 무엇보다 일본이 입게 될 막대한 경제적 손해 때문임을 수치로 증명했다. 일본은 도쿄 올림픽 개최를 위한 비용으로 일본 올림픽위원회 6030억 엔, 도쿄도 5973억 엔, 중앙정부 1500억 엔 등 총 1조 3503억 엔(한화 약 15조 원)을 투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근 발표대로 행사를 1년 연기할 경우, 일본 측의 손실액만해도 무려 6408억 엔(한화 약 7조 3천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게다가 올림픽이 정상적으로 개최될 경우 취할 수 있는 유무형적 경제 이익을 고려하면, 일본이 이번 올림픽 연기로 입게 될 경제적 손실은 가늠하기조차 어려울 지경이다. 사실 과거 우리나라가 서울올림픽을 통해 선진국으로 향하는 결정적인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었고, 또 그 후로도 엄청난 경제 성장과 그에 따른 많은 변화를 이루어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번 도쿄 올림픽을 그토록 포기하기 어려워했던 일본 정부의 입장이 이해되기도 한다.

이처럼 올림픽이 오늘날 단순히 국제 스포츠 행사의 의미를 넘어 스포츠를 통한 국위선양, 외화획득 등 막대한 국가적 이익을 창출하는 문화 매체라면, 이 인류 최대의 종합 문화행사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바로 ‘스포츠 스타’들이다. 그런 점에서 스포츠 스타들은 건강한 육체와 정신, 건전한 경쟁심과 승부 근성, 자기희생적 책임의식과 성실성 같은 인류가 끊임없이 추구하는 바람직한 가치들을 발휘해냄으로써 국민의 단결과 국가적 발전을 주도하는 우리 시대의 상징적 리더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광고와 예능을 누비며 전투적으로 활약하고 있는, 그로 인해 연예인에 버금갈 만큼 대중의 숭배 대상이 된 인기 절정의 스포츠 스타들이 대중매체 속에서 자주 눈에 보인다는 사실은 바로 이런 스포츠 스타의 막대한 영향력을 설명해주는 일례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후반까지, 약 50여 년간 스포츠 강국 톱3에 언제나 호명되었던 러시아에는 사회 전반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스포츠 스타들이 다수 존재했다. 역도의 유리 바르다냔(Ю. Варданян), 레슬링의 알렉산드르 칼레닌(А. Карелин), 수영의 알렉산드르 포포브(А. Попов), 스키의 갈리나 쿨라코바(Г. Кулакова), 기계체조의 라리사 라틔니나(Л. Латынина), 피겨스케이팅의 이리나 로드니나(И. Роднина) 등은 지난 소비에트 시절 ‘각본 없는 드라마’를 통해 러시아인들에게 그야말로 ‘각본 없는 감동’을 선사했던 올림픽 스타들이다. 이 선수들의 순위는 각 분야 종목별 기록뿐 아니라 이들이 획득한 메달 갯수의 기록을 합산해 메겨지기도 하는데, 하나의 메달을 따는 것도 대단하다고 칭송받는 올림픽 무대에서 금메달을 무려 9개나 획득했던, 독보적인 러시아 올림픽 스타가 있었다. 바로 러시아 내 올림픽 메달 획득 순위 1위, 세계 올림픽 메달 획득 순위 2위를 기록하고 있는 기계체조 영웅 라리사 라틔니나다. 그녀는 누구이며, 왜 그녀를 올림픽 영웅이라 부를만한가?



 <라리사 라틔니나>


라틔니나의 삶과 활동, 그리고 업적

어른이 되어 라리사 라틔니나라는 이름으로 러시아 스포츠계의 최고 자리에 선 라리사 디리(Л. Дирий)는 1934년 12월 27일, 우크라이나 헤르손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과 소련군이 격전을 벌여 약 200만 명의 사상자를 낳았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사망했고, 라리사는 1살이 채 되기도 전에 어머니와 단둘이 세상에 남겨졌다. 그녀의 어머니는 어린 라리사를 부둥켜안고 어떻게든 삶을 이어가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썼다. 물론 이러한 열악한 삶이 이 모녀에게만 주어진 운명인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휩쓸고 간 황폐한 도시에서 그곳 주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처참한 삶을 살았다. 훗날, 전쟁 직후 어린 시절의 삶을 떠올리며 라리사는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결코 전쟁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그 누구도 그것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주변 동료 가족 중 전쟁의 불행을 겪지 않은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파편과 화약으로 뒤덮인 스탈린그라드 전투 지역 땅속 어딘가에 나의 아버지가 묻혀 있습니다.”

어머니는, 많은 이웃이 그랬던 것처럼, 오롯이 자신의 책임이 된 가족을 위해 생계라는 혹독한 전선에 뛰어들어 밤낮으로 일을 해야만 했다. 그녀는 청소부로 보일러공으로 언제나 동분서주했다. 그 와중에 어머니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원칙이 있었다. 바로 자신의 딸 라리사에게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치더라도 좋은 교육의 기회를 마련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오로지 라리사를 위해 전투적인 삶을 살아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라리사는 발레리나를 꿈꿨다. 그녀는 언제나 볼쇼이 극장 무대에서 층층이 이어진 객석의 홀을 마주해 박수갈채를 선사받고 있는, 발레리나가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폐허가 된 고향 풍경과 대비되는 극장의 화려한 무대, 자신이 걸치고 있던 누더기에 대비되는 공주풍 발레 의상은 그녀에게 ‘이루고 싶은 꿈’ 그 자체이지 않았을까. 그러던 어느 날, 라리사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발레 스튜디오가 생겼다는 소식을 접했다. 수업료는 한 달에 150루블에 달했다. 이는 집안 소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큰 금액이었으나, 어머니는 주저 없이 그녀에게 그 돈을 내어주었다. 어렵사리 등록한 발레 스튜디오에서 라리사는 곧 두각을 나타내었고, 선생님들은 그녀의 재능과 열정에서 가능성과 희망을 보았다.



<라틔니나의 어린 시절>

그러나 발레 스튜디오는 곧 문을 닫고 말았고, 라리사는 슈콜라 체조부에 등록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체조선수로서의 앞길을 열어준 미하일 소트니첸코(М. Сотниченко) 감독을 처음 만났고, 그의 지도 아래서 그녀의 재능은 더욱 빛을 발했다. 라리사는 1950년 우크라이나 청소년 국가대표팀에 합류하게 되었으며, 곧 카잔에서 개최된 학생 대상의 소비에트 연방 올림픽에 참가하면서 치열한 경쟁 무대에 데뷔했다. 첫 무대는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단 하나의 상도 받지 못한 채 돌아온 라리사는 더욱 혹독한 훈련에 들어갔다. 그렇게 치열한 경쟁과 노력으로 라리사는 점차 ‘소련을 대표할 스포츠 스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1953년 좋은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키예프의 폴리테크닉 연구소에 입학해 알렉산드르 미샤코프(А. Мишаков)라는 트레이너의 지도를 거쳤으며, 2년 후에는 체육 연구소로 배움의 터전을 옮겨 훈련을 이어갔다. 그 즈음 그녀의 개인적인 삶에도 변화가 생겼다. 바로 해군사관학교 생도 이반 라틔닌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던 것이다.

국제무대에서의 데뷔는 라리사의 나이 19세가 되던 해에 열렸던 1954년 로마 세계선수권 대회였다. 당시 소련 대표팀은 단체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라리사가 개인전에 데뷔한 것은 1956년 멜버른 올림픽이었다. 여기에서 유력 우승후보였던 헝가리 대표 켈레티 아그네스(Keleti Agnes)와 경쟁했는데, 그녀는 마루에서 켈레티를 꺾었고, 총 메달 6개(금메달 4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라는 기록을 세웠다. 올림픽 폐막 후 러시아로 돌아온 라리사는 자신의 첫 스승 소트니첸코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대회에서 받은 금메달 중 하나를 선물했다. 소트니첸코는 라틔니나의 메달을 평생 동안 소중히 간직했고, 그가 사망하자 그의 아내는 라틔니나에게 메달을 돌려주었다고 한다.

라틔니나가 소비에트 스포츠 영웅으로 더욱 이름을 알린 것은 1958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4회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였다. 그녀는 단체전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을 뿐 아니라, 마루 2연승, 평균대와 이단평행봉 2위, 도마 3위 등 총 6개 종목 중 5개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렇게 라틔니나는 1960년 로마 올림픽의 유력 우승 후보로 언급되며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한껏 얻었다. 이와 같은 대중들의 관심은 라틔니나가 세운 기록이 경이로운 수준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세계 선수권 대회 당시 그녀가 임신한 상태였다는 사실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이 믿기 어려운 뉴스에 소련 사회는 라틔니나를 향한 환호와 박수,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는 동년 12월 건강히 출산했고, 이후로도 상승세를 이어나가 2년 뒤 로마 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 3개,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를 획득했다.

1964년, 어느덧 그녀 나이 서른, 라틔니나는 어린 팀원들을 이끌고 세 번째 올림픽 무대에 나갔다. 도쿄 올림픽이었다. 동료들에 비해 상당히 많은 나이임에도 그녀는 한창 전성기에 접어든 선수들과 대등하게 소련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다. 그러나 나이 탓이었을까. 지난 10년간 체조 영웅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라틔니나는 체코 대표 베라 차슬라브스카(В. Чаславска, 64년, 68년 올림픽에서 금메달리스트)에게 1위의 자리를 내어주고야 말았다. 사실 그녀에게 이 경기가 더욱 아쉽게 느껴졌던 것은, 1962년 세계선수권 개인 종합전에서 한 차례 차슬라브스카를 꺾고 우승을 거머쥔 바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라틔니나는 도쿄 무대에서 비록 금메달을 얻지 못했으나, 자신의 메달 기록에 이단평행봉 은메달, 평균대 은메들, 뜀틀 동메달을 추가했고, 세계 올림픽 역사에 총 18개의 올림픽 메달(금 9, 은 5, 동 4)을 획득한 선수로 기록되어 있다.



 <라리사 라틔니나의 선수시절>

마이클 펠프스 vs 라리사 라틔니나

2012년, 소비에트 기계체조의 전설 라틔니나가 다시 한 번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 사건이 있었다. 바로 또 다른 올림픽 스타, 미국 출신 수영 황제 마이클 펠프스(Michael Phelps) 덕분이었다. 사실 펠프스는 라틔니나보다 금메달 9개를 더 많이 보유해 총 18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다. 펠프스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6관왕에 오른 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는 이보다 두 개의 금메달을 더 추가해 8관왕을 차지했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는 금메달 4개와 은메달 2개를 추가했고, 이로써 펠프스는 라틔니나의 역대 올림픽 개인 최다 금메달 기록(9개) 역사를 다시 썼을 뿐 아니라, 22개의 메달 중 금메달만 18개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의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펠프스에게 위기가 왔다. 런던 올림픽의 열기가 무르익어 막바지로 향해갈 무렵인 8월, 펠프스가 런던에서 딴 메달을 박탈당할 수도 있다는 소식이 세계 언론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미국 야후스포츠가 펠프스의 루이 비통(Louis Vuitton) 광고사진이 대중에게 공개된 시점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규정에 위배되었다는 문제를 지적하고 나섰던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IOC는 런던 올림픽을 앞두고 광고와 관련한 규정 ‘룰40(Rule 40)’을 공지했다. ‘룰40’은 올림픽을 전후로 올림픽 공식 스폰서가 아닌 업체가 출전 선수를 광고에 등장시킬 수 없도록 한 규정이었고, 이를 위반할 경우 해당 선수에게 거액의 벌금을 부과할 뿐 아니라 대회에서 획득한 메달 자체를 박탈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 규정을 고려하면, 2012년 런던대회에는 세계 굴지의 대기업들이 공식 스폰서로 등록되어 있던 상황에서 펠프스의 루이 비통 광고는 8월 16일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펠프스가 나오는 루이 비통 광고사진은 8월 13일부터 미국 방송을 통해 보도되었고, 유튜브에까지 공개된 상황이었다. 당시 루이 비통과 펠프스 측은 모두 사진 유출 의혹에 대해 강력히 부인하고 있었으나, 이 논란은 한동안 사그라들지 않았다.


 <라틔니나와 펠프스, 2012 루이 비통 광고>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당시 언론이 이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었던 내용이었다. 언론은 공교롭게도 당시 펠프스의 활약으로 메달 순위 1위에서 2위로 밀려난 라틔니나와 라틔니나의 1위를 쟁탈한 펠프스가 나란히 한 장의 사진 속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보도했다. 실제로 논란이 되었던 2012년 루이 비통 광고에는 펠프스뿐 아니라 라틔니나도 함께 모델로 기용되었고, 이들이 함께 촬영한 사진은 “특별한 두 가지 길. 하나의 운명(Due percorsi straordinari. Uno stesso destino)”이라는 제목으로 패션 잡지에 실렸다. 이와 관련해 당시 많은 언론은 두 선수 중 과연 누가 메달 순위 1위의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를 예측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루이 비통 광고 논란이 곧 해명될 것이라는 기사를 써냈는가 하면, 다른 한 편에서는, 특히 러시아 내에서는, 펠프스가 런던 올림픽에서 획득한 메달을 박탈당할 것이며 라틔니나가 그 이전 48년간 이어온 메달 순위 1위의 자리를 되찾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후 사건이 어떻게 일단락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현재 올림픽 개인 통산 메달 기록에 펠프스가 1위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아무래도 2012년 광고 논란은 유야무야 사그라든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라틔니나는 바뀐 메달 순위에 대해 어떤 입장이었을까? 순위 변화에 대한 심경을 묻는 인터뷰 질문에 그녀는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지난 48년간 자신의 기록이 부동의 1위였기에 새로운 기록갱신은 필요한 것이고, 이제 넘겨줄 때가 되었다’고 밝히며 펠프스의 재능과 능력이 자신의 기록을 가져갈 만하다는 입장을 말했다. 사실 펠프스가 올림픽에서 새 기록을 남긴 역사적인 그날, 라틔니나는 경기가 열린 런던 아쿠아틱 센터 관중석에 앉아있었다. 남자 계영 800m에서 펠프스가 터치패드를 찍으며 19번째 메달을 확정지은 순간 라틔니나는 그에게 축하의 박수와 웃음을 보내며 2위의 자리로 물러났다. 그녀가 이날 직접 경기장을 찾은 이유가 혹시 자신의 1위 자리를 현장에서 직접 넘겨주고 싶었던 마음이었던 것은 아닐까. 이날 이들이 보여준 훈훈한 모습은 세계 스포츠 애호가들의 마음에 승리의 기쁨과는 또 다른 가슴 찡한 감동을 선사했다.



 <펠프스의 경기를 관람하는 라틔니나, 2012년 런던 올림픽>

 

사실 올림픽 시상식에는 언제나 더없이 치열한 경쟁에서 이긴 승리자들이 존재한다. 선수들의 순위는 그들이 흘린 땀과 눈물, 노력과 인내에 대한 보상이며, 그들이 누리는 인기와 명성은 포장된 혹은 꾸며진 이미지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연예계 스타들의 그것과는 결을 달리한다. 이는 즉 그들의 인기가 가상의 공간 속에서 인위적인 가상 캐릭터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며, 그들이 스포츠라는 현실의 엄중한 승부 세계 속에서 선보인 퍼포먼스와 성취가 대중들에게 진한 감동과 신뢰로 다가감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운동선수들은 오로지 신체 단련의 결과로 얻어지는 기량, 그 기량의 기록으로만 평가받으며, 선수의 스타성은 실력과 기록이라는 객관적인 데이터와 그 결과에 따른 관객들의 환호로부터 비롯된다고 하겠다. 그리고 스포츠 팬들에게 기쁨과 감동을 선사하는 다른 하나가 있다. 바로 페어플레이 정신과 스포츠맨십으로 일컬어지는 ‘건강한 정신’일 것이다. 당시 20대 미국 현역 선수 펠프스와 70대 러시아 거장 라틔니나가 보여준 훈훈한 모습은 올림픽이 추구하는 스포츠 정신의 실천일 수 있으며, 이런 점에서 볼 때, 스포츠 스타를 우리가 영웅으로 일컫는 현상은 ‘스포츠 스타의 탄생 과정’ 자체가, 그리고 그들의 ‘건강한 육체’와 ‘건강한 정신’이 전통적 영웅들이 취하는 삶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세계적 브랜드 루이 비통이 이 두 선수를 모델로 기용한 것 역시 그들의 건강한 육체, 그리고 그들 삶에 녹아 있는 건강한 정신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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