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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고려인의 밥상을 찾아서
분류전통문화
국가 러시아
날짜2020-04-01
조회수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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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밥’... 고향 집 부엌에서 갓 지어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은 인간의 영혼을 달래줄 정도로 따뜻하고 정겹게 느껴지지만, 고된 노동과 타향살이에 지쳐 정처 없이 떠돌던 그들의 식탁 위 음식은 친숙하면서도 어딘가 낯설다. 타향이 고향이 된 지 어언 150년. 소위 카레이스키(고려인, 고려사람)로 불리는 그들의 이주와 고단했던 삶 속에 차려진 식탁을 살펴본다. 


 <왼쪽부터 ‘고려인 최초의 정착지 지신허 마을의 옛터’, ‘이주 초기 한인들의 모습’>
 

러시아 제국의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시베리아지역의 정치·지리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1858년에 아이훈조약으로 아무르江 좌안 지역을 획득하고, 1860년에는 베이징 조약을 통해 우수리江 동쪽의 연해주를 청나라에서 러시아로 복속시킨다.

1864년 조선. 가난과 배고픔 그리고 폭정과 횡포를 견딜 수 없던 13가구의 함경도 출신 한인들이 조선의 국경을 넘어 남부 우수리스크에 촌락을 형성했다. 그들은 지금의 북한 함경북도를 넘어 비노그라드나야江(река Виноградная) 주변에 러시아 최초의 한인 마을 ‘지신허(地新墟)’에 정착하여 집단 촌락을 이루었다. 연해주는 역병과 대기근을 겪고 있던 조선을 벗어난 새로운 삶의 터전이자 피난처였다. 당시 러시아는 적극적인 태도로 이들에게 식량과 토지를 제공했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줌으로써 극동의 인구를 키우고자 했다. 이에 조선인들은 함경도 농사법을 활용하여 수수, 메밀, 보리, 조, 콩 등을 연해주에서 경작했다. 밭일은 생계 수단이었고, 당시 러시아는 관용적인 태도로 그들의 정착을 수용했다. ‘러시아’라는 낯선 땅에서 한복을 입고 조선의 방식으로 조선의 작물을 경작하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러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에 널리 퍼져있는 50만 인구의 뿌리이자 조선의 첫 디아스포라 ‘카레이스키’다.


<왼쪽부터 고려인 음식 ‘국시’, ‘당근 김치’, 생선으로 만든 초무침 ‘해’>
 

조선인들은 함경도에서 경작하던 밭작물을 연해주에 그대로 옮겨심었고, 이를 수확하여 허기를 달랠 수 있었다. 그들은 밭곡식을 활용한 함경도식 조리법을 이어받아 조, 콩, 기장을 활용하였고, 추운 겨울을 지내기 위해 최소한의 소금과 곡식을 발효시킨 저장 음식을 잘 활용했다. 함경도에서는 밥은 ‘바비’, 국수는 ‘국시’, 미역국은 ‘미여기국’, 채를 썬 채소로 만들어진 음식은 ‘채’로 불렸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고려인들이 자신들의 일상 음식을 함경도방언으로부터 그대로 차용했음을 방증한다.

변화된 물리적 환경은 고려인들의 상차림도 바꾸어 놓았다. 함경도방언으로 ‘국시’라고 불리는 고려인 음식 ‘국시’는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한국식 국수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함경도식 ‘국시’가 육류중심의 식사를 하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식생활을 고려해 고명으로 고기, 양배추, 토마토, 사과, 딜(dill, 러시아어로 Укроп이라고 불리는 허브의 일종) 등을 올리는 고려인 국시로 바뀌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가자미식해는 고려인 음식 ‘해 또는 회’(Хе по корейски)에 해당하는데, 소금과 쌀밥을 섞어 숙성시키는 함경도식 식해가 러시아 육류문화를 만나 초무침 스타일로 바뀌었다. 그들은 바다 생선이 아닌 민물 생선을 사용하거나, 혹은 닭, 소, 돼지, 양고기와 같은 육류에 식초를 넣어 시큼한 맛을 더하여 고려인 스타일의 ‘해’를 만든 것이다.

한편, 전에는 조선인들이 국경을 넘은 이유가 가난과 굶주림 등의 경제적인 문제였다면, 일제강점기에는 주로 정치적 탄압을 피해 국경을 넘었다. 당시 연해주 전체 인구의 30%가 조선인이었을 정도로 블라디보스토크는 일제강점기의 탄압을 피해 정착한 한인들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는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여러 韓人학교가 설치되기도 했다. 그들은 한편으론 자치권과 민족자치체를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조선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족의 비극과 슬픔을 간직한 채 소비에트 사회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다민족국가를 지향했던 소비에트 초기 지도자 레닌은 소수민족을 아우르는 가운데 러시아주의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大국가주의를 주창했고, 소수민족들의 자결권 인정에 긍정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나 레닌의 통치이념을 부인한 스탈린은 소수민족을 러시아공화국에 종속시키고자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일국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다. 당시 소비에트와 일본의 잦은 충돌은 한인들이 일본의 첩자가 될 것이라는 의심을 키웠으며, 연해주 지역에서 러시아 농민과 한인 간의 토지 분쟁이나 한인들의 독립운동은 소비에트 정부의 눈엣가시였다. 결국, 1937년에 스탈린은 민족 분산정책, 소수민족 이주 정책을 내세워 약 20만 명에 달하는 고려인들을 네 차례에 걸쳐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이주를 단행했다. 이로 인해 한인마을은 완전히 무너졌고, 그들의 경제적, 정치적 기반도 사라지게 되었다.

소비에트 정부의 강압적인 강제이주로 인해서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긴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황무지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황량한 사막지대에서 물을 찾아내 도랑을 만들고 밭을 개간하여 생존을 이어갔다. 이 시기 러시아 남부 로스토프에서는 고려인들이 ‘돈리스’라는 조합을 만들어 벼농사에 성공하였으며, 이후 어업 콜호즈, 농업 콜호즈 등을 건설하였는데, 이러한 성공은 뿔뿔이 흩어졌던 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왼쪽부터 고려인 음식 당근채 ‘마르콥챠’, 고춧가루가 살짝 들어간 ‘짐치’>
 

새로운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이들은 러시아어를 능숙하게 구사해야만 했다. 그로 인해 모국어를 점차 잃게 되었고, 생활환경도 급격히 바뀌어 갔다. 고려인의 식생활 문화에 소비에트 식탁 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서로 다른 음식 문화가 만나 제3의 음식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은 감자를 주식으로 삼아야 했고, 식탁에는 커피와 차가 놓이게 되었다. 어떻게든 전통 식문화를 고수하려 했지만, 배추나 고춧가루조차 넉넉지 않아 당근을 잘게 채 썰어 소금에 절여 먹었다. 러시아어로 당근을 의미하는 ‘마르코프(морковь)’와 함경도 나물 음식을 가리키는 단어 ‘채‘가 만나, 고려인식 당근 김치 ’마르콥챠‘(морковча по-корейски)가 되었다. 또 이들의 김치에는 고춧가루가 거의 없다, 그래서 김치가 아닌 ‘짐치’다.



<왼쪽부터 ‘사할린 고사리’, ‘사할린 고사리 볶음’, ‘사할린 미역나물’>
 

한편 러·일전쟁(1904) 후 일본은 사할린 남부를 차지했다. 이후 사할린은 1945년까지 남북으로 나뉘었고, 양국은 석유와 석탄 채굴권을 두고 분쟁을 겪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으로 열세에 몰린 일본은 러시아에 사할린 남부를 반환하고, 결국 완전히 철수하게 된다. 당시 일제에 강제징용되어 사할린에 내던져진 한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된 한인들과 달리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러시아 시민 혹은 무국적자가 되었다. 사할린의 고려인들은 자신들이 방치된 그곳에서 어떻게든 생계를 꾸려가야만 했다. 그들은 바다에서 다시마와 미역과 조개, 산에서는 고사리 등 러시아인들이 먹지 않는 해산물과 나물을 적극적으로 채취하여 자신들만의 식문화 전통을 이어갔다.

스탈린 사후 고려인들의 거주 공간은 중앙아시아와 사할린을 넘어 점차 소비에트 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고르바초프의 개방 정책 이후 거주지 이동이 한결 수월해진 고려인들은 자유를 찾아 중앙아시아를 떠났고, 모스크바 혹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거나 연해주로 재이주를 하였다. 더불어 그들의 식문화는 가장 유럽화된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 시장으로까지 확대되었다. 1990년대부터 한국과 러시아는 상호 협의를 거쳐 사할린 동포들을 영구 귀국시키는 시범사업을 진행하고 있고, 1993년 러시아연방 최고회의는 러시아 고려인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강제이주의 탄압이 불법적인 행위였음을 인정했다. 농촌을 떠나 도시에 사는 고려인이 늘어나면서 혹은 연해주로 재이주를 하면서,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음식인 ‘마르콥챠’를 비롯한 ‘카레이스키 샐러드’, 만두 ‘베고자’, 초무침 ‘해’, ‘사할린 미역과 고사리 무침’ 등을 러시아 전역의 음식점과 마트에까지 진출시키고 있다. 현재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지에 약 50만 명의 고려인이 거주하고 있는데, 2019년 국내 체류 고려인 인구는 8만 명에 육박한다. 여전히 한국에서 이들의 정착 문제는 ‘뜨거운 감자’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결과는 사필귀정 일터! 한편으로는 불행한 역사의 결과가 이제라도 바로잡히길 바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돌아온 고려인들의 손에서 어떤 고려인식 ‘카레이스키 살랏’이 탄생할지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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