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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작가 이반 슈멜레프의 비극과 작품들
분류문학
국가 러시아
날짜2020-03-23
조회수610
첨부파일

1931년과 1932년에 연거푸 노벨문학상 후보로 지명된 이반 슈멜레프(И.С. Шмелёв, 1873 – 1950)는 망명지 프랑스에서 기나긴 불면의 시간에 어김없이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 뛰어 놀았던  자신의 집 뒷마당, 고대 발람 수도원(Валаамский монастырь)으로 간 신혼여행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향수병이었다.  조국 러시아를 떠나 멀리 이역 땅에 살면서 떠나온 조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몸부림 치고 있었다. 그런데 이반 슈멜레프의 조국에 대한 애착, 자기 삶에 대한 추억은 오직 혁명 전의 러시아였다. 스스로 자서전에서 언급했듯이, 망명 전 러시아에서 보냈던 모스크바 대학 법학부 시절, 변호사 사무실에서의 일의 경험, 공무원 시절, 사랑과 존경의 시선으로 러시아 민중을 영혼 속에 그렸던 초기 창작시절 등을 기억의 창고에서, 그 공간을 뒤지며 힘겹게 끄집어내고 있었다.

<이반 슈멜레프>

아들의 비극적인 죽음

이반 슈멜레프는 1922년 이반 부닌의 초청으로 프랑스 파리로 망명하기 전, 자신의 아들이 총살당한 러시아의 ‘아름다운 얼굴에 생긴 흉터나 상처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러시아의 전체 얼굴을 기억하고, 여전히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러시아의 얼굴이 아름답다고 믿고, 그 아름다운 얼굴을 기억하기 위하여’ 조국을 떠난다고 했다. 진실로 사랑했던 연인이 사랑을 속삭인 공간을 떠났을 때, 사랑했던  연인이 문득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던 것을 기억하는 것처럼, 이반 슈멜레프도 러시아 밖에서 동토의 땅을 그렇게 기억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아들을 죽인 조국 러시아의 얼굴이 아름답게 슈멜레프의 저 가슴 밑바닥에 남아 있었던 걸까?

1921년 이반 슈멜레프의 아들인 세르게이 슈멜레프는 ‘백군’에 들어가 활동한 죄목으로 총살당했다. 정당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수사나 공정한 재판도 없이 미래의 소비에트 정권에 의해서 자행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반 슈멜레프는 오랫동안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알지 못했기 때문에 행방이 묘연해진 아들을 찾기 위해서 동분서주 했고, 일면식도 없던 거칠고 투박한 공무원들의 사무실을 전전하면서 아들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서 머리를 조아렸다. 아들을 끝내 찾지 못한 슈멜레프는 그 당시 권력의 실세인 루나차르스키(А.В. Луначарский)에게 행방불명된 아들에 대한 절절한 부성이 담긴 편지를 다음과 같이 적어 보냈다:    

나의 유일한 모든 것, 아들이 없으면 나는 죽습니다. 나는 살지도 못하고,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처절하고 아픈 마음이 나를 부여잡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온통 극심한 슬픔으로 가득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힘없이 우는 겁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살 수가 없습니다. 당신에게 고통스런 목소리로 울부짖으면서 부탁드립니다, 제발 아들을 찾게 도와주십시오. 그는 나의 모든 것입니다. 영혼이 깨끗하고 순진한 내 아들은 아무 죄도 없습니다.

아들이 총살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슈멜레프는 시신을 찾고 인도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소비에트 정권을 향해서 ‘아들의 몸을 대지로 돌려보내기 위해서라도 아들의 유골을 찾아야 하고, 그것은 아비된 사람의 권리’라고 절규했다.

자식을 먼저 보낸 참담한 경험을 한 이후, 그 충격으로 슈멜레프의 목소리는 어눌해졌고,  보기 민망할 정도로 야위어 졌다. 지인들조차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러시아의 전형적인 노인의 모습으로 팍삭 늙어 버렸다. 언제나 직선적이고 단순했던 성격에 활동적이고 유쾌했던 멋진 중년의 작가는 그렇게  허리가 구부러진 백발의 노인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자식을 앞세운 참척의 고통으로 인하여 이반 슈메레프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나타났고 그의 슬픈 회색 눈은 생기를 잃어버렸다.

아들의 잃은 비통함은 또한 슈멜레프의 정신까지 공허하게 만들어 그 재능 많았던 대가는 한 순간에 그의 빛났던 창조의 영감을 잃어버렸다. 아들의 죽음 이후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모든 것을’이라고 수 없이 되뇌인 슈멜레프는 자신의 창작의 원천인 ‘신’마저 잃어버린 ‘지금 나는 도대체 어떤 작가일까?’라고 자조적으로 말하곤 했다. 슈멜레프는 어떤 상황에서도 ‘신’의 존재는 항상 작가에게 꼭 필요하고,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공간에 대한 인식은 신으로부터 시작되고, 그러한 역할을 하는 신 없이는 작가의 창조성은 발휘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발람의 바위에서. 세상의 경계를 넘어. 여행의 단상

아들의 비극적인 죽음이 있기 전까지 만 해도 이반 슈멜레프는 아주 독실한 정교신자였다. 정교 전통을 기반으로 한 관습과 문화를 가진 가부장적인 가정교육 받았기 때문에 어렸을 때 정교를 믿었던 슈멜레프는 젊은 시절 한때 철저한 무신론자가 되었지만 1895년 10월 올가 아흐쩨르로나(Ольга Охтерлона, 1875-1936)와 결혼하면서 정교신앙으로 다시 돌아왔다. 신앙심이 깊은 올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는데, 이것에 대하여 슈멜레프는 평생 동안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꼈다고 한다. 또한 올가의 요청에 의해서 정해진 신혼여행 장소도 고대 발람 수도원이었다고 하니, 정교신앙에 대한 그녀의 독실함을 알 수가 있다.

<발람 수도원>

 슈멜레프 부부는 발람 수도원의 장로 바르나프 게프시만스키(Варнав Гефсиманский)로부터 축복까지 받았는데, 발람 수도원 여행을 소재로 한 작품 <발람의 바위에서. 세상의 경계를 넘어. 여행의 단상>(На скалах Валаама. За гранью мира. Путевые очерки)은 슈멜레프의 첫 번째 창작품이 되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러시아 정부의 검열에서 부분부분 잘려 나가서 출판되었는데,  이 같은 폭압적인 행위에 충격을 받은 젊은 작가는 한동안 문학에서 손을 놓고 말았다. 이 작품은 망명 이후 슈멜레프의 편집으로 <오래된 발람>(Старый Валаам,Париж, 1935)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판되었다.
 

창작초기 작품들과 <레스토랑에서 온 남자>

전통적인 상인 가족에서 태어난 이반 슈멜레프는 고등학교 졸업 후,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  1894년 모스크바 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했다.  졸업 후, 슈멜레프는 사무실에서 조수로, 러시아 정부에서 잠깐 별정직 공무원으로 일도 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을 지속적으로 키워온 작가는 1907년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문학적 창조에 전적으로 전념했다. 전업 작가가 된 이후 슈멜레프의 창작의 주제는 어린시절 부터 관심이 많았던 러시아 사회와 민중이었다. 그래서 슈멜레프는 사회적문제의 토론을 지향하는 작가모임에 열정적으로 참가했는데, 대표적인 단체가 바로 테레쇼코프의 <수요일>(среда)과 <지식>(знание)이었다. 알려진 대로 러시아 격동기 시기인 1900년대 초 민주주의적 지향을 가진 작가들의 계층화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친목 단체들의 작가들은 러시아 문학전통을 계승한 전형적인 ‘지식인’들로 남았다.

슈멜레프의 초기 작품은 대부분 잡지 <러시아 사상>(Русская мысль), <어린이 독서>(Детское чтение)를 통해 발표되었는데, <특무상사>(Вахмистр), <급한 일을 따라>(По спешному делу), <붕괴>(Распад)-, <이반 쿠즈미츠>(Иван Кузьмич), <시민 우크레이킨>(Гражданин Уклейкин)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혁명’을 주제로 다룬 이 작품들의 주인공들은 혁명을 세상을 깨끗하게 하는 ‘정화’, 엔트로피를 생산하는 긍정적인 힘으로 보고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는데, 그 혁명이 나중에 무시무시한 괴물로 변해 슈멜레프의 아들을 삼키고 말았으니!!!

<레스토랑에서 온 남자> 영화 포스터

슈멜레프의 초기 작품 중 흥미로운 작품은 작가에게 전 러시아적인 명성을 안겨 준 <레스토랑에서 온 남자>(Человек из ресторана)이다. 이 작품은 슈멜레프가 선호하는 중편(повесть)형식으로 발표 되었는데, 비평가들은 이 중편이 나오게 되는 과정을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적인 등단과 자주 비교했다. 슈멜레프는 ‘가난한 사람들’의 전통을 이으면서, 부조리의 환경에 놓인 민중, 처참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고통 받는 도시민들을 구제할 수 있는 새로운 위로의 길을 열었다. 그 위로의 길은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었는데, 상처받은 영혼(소설의 주인공들이나, 러시아 민중들이나 마찬가지로)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 러시아에 대한 믿음 속에서 가능하다고 슈멜레프는 확신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레스토랑에서 온 남자>는 슈멜레프를 죽음에서 구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대충 이러하다. 1920년에 차르 군대의 예비 장교로서 혁명군에게 체포된 슈멜레프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는데, 체포된 반혁명정치범들의 처형에 대한 전권을 가진 군사정치위원이 인기 소설 <레스토랑에서 온 남자>의 창작자로 눈앞에 서 있는 슈멜레프를 인정하고, 그를 풀어주었다는 것이다. 이작품은 소련에서 1927년에 영화화 되었다.


전쟁과 혁명의 대한 작품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칼루가 영지에 머물렀던 슈멜레프는 단편 <혹독한 나날들>(Суровые дни), 중편 <그 시절>(Это было)을 통하여 무자비한 폭력이 난무한 전쟁을 인간의 자기 파괴와 인간의 광기의 결과로 잉태된 전쟁에 대한 혐오감을 명확하게 표현하였다. 그런데 슈멜레프는 물리적이고 폭압적인 힘이 작동하면서 광란의 짓거리(이반 부닌의 표현처럼)로 변질된 러시아 혁명(특히 10월 혁명), ‘어디를 가든지 파괴와 혼돈’의 한가운데 있는 종말론의 분위기를 풍기는 러시아 혁명을 직접 경험하면서도 러시아 혁명의 결과에 대해서는 낙관적으로 보았다.  러시아의 아름다움과 정화 능력을 믿었던 슈멜레프는 ‘위대한 러시아에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역설하면서 행동으로서 그 소심한 환영(특히 2월 혁명)에 대한 진정성을 보였다. 슈멜레프는 민중이 많이 모인 집회에서 연설을 했고, <러시아 통보>(Русская водомость)의 특파원 자격으로 시베리아에서 해방된  정치범들도 만났다. 또한 그는 신문 <민중의 권력>(Власть народа)에서 일하기  까지 하였으니, 상기 했듯이, 비극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 혁명이 슈벨레프의 사랑스런 아들을 죽였으니.....

1918년 슈멜레프는 알루투슈에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에 지어진 아담한 다차를 구입했다.  그가 말했듯이 ‘2개의 방이 있는 흙으로 만든 작은집’에서 아내와 함께 몇 년을 지냈는데, 이 시기를 포함한 4년 정도의 시간은 슈멜레프의 인생에서 가장 비극적인 시기였다. 슈멜레프가 표현 한 것처럼, 그 곳에서 본 ‘바다는 바다가 아니었고, 태양도 태양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마 그 시기혁명에 의해서 탄생된 권력에 의해서 희생된 아들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었던 것 같다. 상기 했듯이, 비극적인 아들의 운명은 이반 슈멜레프의 삶과 러시아를 바라보는 태도를 바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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