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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호두까기 인형>이 고전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분류공연예술
국가 러시아
날짜2020-03-02
조회수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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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주인공 ‘클라라’네 집. 크리스마스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사람들이 클라라네 집에 삼삼오오 모이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마법사에게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받고 기뻐하던 클라라, 오빠 프릿츠의 장난으로 인형이 망가지자 인형을 품은 채 눈물을 흘린다. 그날 밤 12시, 종이 울리자 클라라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크리스마스를 망치려는 생쥐들의 습격에 거실 장식장에 놓여있던 인형들이 맞서며 한바탕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인형들의 선두에 선 호두까기 인형이 위기를 맞게 되나 클라라의 도움으로 전투는 승리로 끝나고, 멋진 왕자로 변신한 호두까기 인형은 클라라를 자신의 고향 ‘장난감 왕국’으로 초대한다. 이와 같은 어린 소녀와 인형의 로맨틱한 환상 스토리는 매해 12월이면 세계 각지에서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무대에 오르고 있는 발레 <호두까기 인형Щелкунчик>의 줄거리다.

독일 작가 에른스트 호프만(E.T.A Hoffmann)의 <호두까기인형과 생쥐 왕The Nutcracker and the Mouse King>을 바탕으로 하는 2막 3장 발레 <호두까기 인형>은 이반 브세볼로즈스키(И. Всеволожский)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마리우스 프티파(М. Петипа)의 대본과 레프 이바노프(Л. Иванов)의 안무, 표트르 차이코프스키(П. Чайковский)의 음악이 결합해 탄생한 작품으로 러시아 클래식 발레의 대표하는 3대 걸작 중 하나이다. 이처럼 19세기 러시아 황실 발레단을 주도했던 발레마스터 프티파, 그리고 당시 이미 <백조의 호수Лебединое озеро>와 <잠자는 미녀Спящая красавица>로 유럽 음악계에서 인지도를 높였던 차이코프스키가 협업한 결과물이었음에도, 이는 초연 당시 흥행에 처참히 실패하고 말았고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동심의 세계가 우리에게 인상적이듯 지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도 그랬기 때문일까. 이바노프 버전의 실패 이후, <호두까기 인형>을 각색, 재상연하려는 러시아 주요 안무가들의 시도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고전의 반열에 오르고 오늘날과 같은 인지도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어떤 버전들이 주목받아 왔는가?

    

 
<'호두까기 인형'. 볼쇼이발레단, 2014>

바실리 바이노넨 

초기 소비에트 시대의 버전을 살펴보면, ‘클래식 발레의 소비에트화’를 주도했던 알렉산드르 고르스키(А. Горский)는 초연 이후 27년 만인 1919년 볼쇼이 극장 무대를 통해, 표도르 로푸호프(Ф. Лопухов)는 그 후로 10년이 지난 1929년 키로프 극장 무대를 통해 이를 재상연했으나 모두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초기 소비에트 버전 중 <호두까기 인형>의 성공사례로 꼽히는 것은 바실리 바이노넨(В. Вайнонен)이 1934년 키로프 극장에서 선보인 버전이었다. 이는 프티파 발레와는 다른 버전으로 외형상의 변화를 거쳤는데, 소비에트라는 시대적 특성상 해당 사회가 추구했던 새로운 예술적 가치에 따라 수정되어야 했던 까닭이었다. 바이노넨이 활동했던 1930년을 전후한 시기 러시아 발레마스터들은 사회주의 이념에 부합하는 작품 창작에 뛰어들어야 했다. 더욱이 1934년 제1회 소비에트 작가 회의에서 소비에트 리얼리즘이 채택된 이후로는 소비에트 문학예술의 탁월성을 위해 사회주의 작가가 지켜야 할 창작원칙에 입각한, 정치성, 사실성, 민중성을 기본 축으로 하는 작품들이 대거 출현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유럽 낭만주의적 환상성과 이국성이 농후한 <호두까기 인형>은 사실상 소비에트 인민들에게 공개하기에 부적합한 작품으로 평가되었고, 바이노넨은 작품 내 크고 작은 부분들에 변화를 가하며 다시금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일례로, 그는 주인공의 이름이 바뀌었다. 작품이 탄생한 시점부터 그때까지 ‘마리헨’에서 ‘마리’로, 다시 ‘클라라’로 바뀌어야 했던 극중 소녀의 이름이 유럽적 이국주의라는 비판에서 탈피하기 위해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된다. 프티파의 클라라는 바이노넨 버전에서 호프만 원작 주인공의 이름 ‘마리헨’과 유사하나 외국식 이름이 아닌 러시아식 이름 ‘마샤’로, 동생 프릿츠는 ‘미샤’로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게 된다. 그리고 서구 기독교 문화를 대표하는 명절인 크리스마스는 소비에트 사회에서 기념할만한 명절이 아니었던바, 작품의 배경 역시 러시아의 최대의 명절 ‘새해’로 대체되기에 이른다. 외형상 러시아 문화 속 러시아인의 삶과 꿈을 그린 작품으로 변신한 <호두까기 인형>은 1934년 2월 18일 초연 이후 흥행에 성공했고, 곧 키로프 발레단의 레퍼토리로 선정되어 소비에트 명절용 발레로 점차 국내 인지도를 확보해갔다.     


조지 발란신

<호두까기 인형>이 세계 무대에서 성탄절을 상징하는 발레로서 입지를 다지고 그 운명을 달리하게 된 것은 고향 러시아에서가 아닌 미국에서였다. 당시 소비에트 사회에서 순수예술 진영 예술가들의 입지가 점차 줄어들게 되면서 많은 이들은 자유를 찾아 서방세계로 대대적인 망명길에 올랐다. 당시 유럽이나 미국으로 떠난 안무가나 무용수들은 세계 각지에 정착해 활동을 이어갔고, 바이노넨의 <호두까기 인형>은 그들에 의해 서구 세계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특히 러시아 출신 미국 안무가 조지 발란신(Д. Баланчин)은 <호두까기 인형>의 세계적 확산과 대중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었다. 그는 모던발레를 탄생시킨 발레 뤼스(Ballets Russes)의 안무가로 활동하며 러시아 활동기를 보내고 난 후, 193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간 전위파 발레안무가다. 1935년부터는 오늘날 미국을 대표하는 뉴욕시티발레단을 결성해 예술감독으로 활동하며 미국 컨템포러리 발레 육성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모던발레를 지향하며 자유로운 창작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기까지 한 그가 돌연 프티파의 유산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호두까기 인형>을 각색해 무대에 올린 일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외부의 궁금증과 관련해,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호두까기 인형>을 선보인 이유가 자신의 ‘창작 세계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아닌,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사실 발레 단체가 티켓 판매로 얻는 이윤과 이를 통한 재정적 자립은 단체의 존립과 직결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뉴욕시티발레단의 창립자이자 발레마스터 발란신의 관점에서 뉴욕시티발레단의 원활한 운영과 자유로운 예술창작 활동을 위해서는 대중들의 기호와 취향을 고려한 대표 레퍼토리의 창작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이러한 가운데 <호두까기 인형>은 성탄절 특수를 노려봄직한 작품으로 그에게 선택되었던 것이다.

발란신 버전은 작품 속에 묘사된 가정의 모습이 이전의 다른 버전과는 느낌을 달리한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프티파의 시대로부터 소비에트 시대에 이르기까지 발레 <호두까기 인형> 스토리에서 일관적으로 유지되어왔던 부분은 바로 권위적이고 귀족적인 스탈바움 가족의 모습이었다. 리브레토에서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19세기로 설정되어 있듯이, 고상한 유럽풍의 의상을 잘 갖추어 입고 통제된 걸음걸이와 제스쳐를 선보이는 크리스마스 파티 장면 속 등장인물들은 누가 보아도 영락없는 고위 관료나 귀족의 이미지였다. 유년기의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듯 극중 남매들과 친구들은 거침없는 장난을 즐긴다. 이 아이들의 행색은 그들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값비싼 듯한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형형색색의 선물상자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화려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와 이들의 어우러진 모습은 관객들로 하여금 이 무대가 전반적으로 부유한 고위계급 인사의 가정임을 짐작케 한다. 반면 발란신은 대체로 원작과 유사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으나, 더욱 안락하고 단란한 미국 중산층 가정의 모습을 그렸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백인 중산계층이 주류를 이루었던 서구사회에서 <호두까기 인형>은 이웃처럼 단란하고 평범한 가족의 모습과 어른들이 그리워하는 어릴 적의 공통경험을 자극함으로써 대중의 정서에 호소한 작품이었다. 또한 발란신은 바이노넨이 설정한 주인공 이름과 배경을 프티파의 버전의 것으로 다시금 되돌려 놓았다. 주인공 마샤는 프티파가 지어준 클라라라는 이름을 되찾았고, 20여 년간 작품의 배경이 되었던 러시아 새해 풍경은 크리스마스로 대체되었다. 이때부터 ‘<호두까기 인형>은 크리스마스 발레’라는 공식이 미국, 나아가서는 세계인의 인식 속에 자리를 잡아갔다.  

 

유리 그리고로비치

이렇게 발란신의 <호두까기 인형>은 서구 세계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지만, 정작 소련에서는 크게 주목받는 작품이 아니었다. 이 작품이 볼쇼이와 마린스키 극장에서 고정레퍼토리로 등극한 것은 비교적 늦은 시기인 1960년대 후반으로, 33년간 볼쇼이 발레단을 이끈 유리 그리고로비치(Ю. Григорович)가 볼쇼이 발레단에 부임한 이듬해에 이를 새로운 버전으로 각색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로비치는 흥행성을 고려해 전반적으로 프티파의 구성과 양식을 따랐으나, 시기적으로 여전히 소비에트 사회였던 터라 내용적인 면에서는 소련식 발레여야만 했다. 그는 프티파의 초연 버전과 바이노넨의 아이디어를 결합해 다시 한 번 볼쇼이 버전의 리브레토로 재탄생시켰다.

그리고로비치가 <호두까기 인형>을 통해 드러낸 메시지는 ‘이상적인 유토피아’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환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소재들이 용납되었던 고전주의 발레에서는 극중 초자연적 힘을 과시하는 마법사가 등장한다거나, 생쥐들이 현실적 개연성과 무관하게 등장해 주인공과 전투를 벌이는 <호두까기 인형>의 스토리가 타당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성에 입각하지 않는 예술이 용인되지 않았던 소비에트 시대의 발레는 환상이라는 허구 세계로부터 빠져나와 현실 세계 속으로 편입되어야 했다. 이처럼 발레라는 장르가 가지는 특유의 성격과 사회적 요구가 상이한 상황 속에서 그리고로비치는 ‘꿈’이라는 예술적 장치를 통해 이 딜레마를 극복했다. 결국 <호두까기 인형>에서 벌어지는 모든 환상적 스토리는 ‘마샤의 꿈’에서 일어난 일로 처리되기에 이르는데, 이와 같은 극중 꿈의 도입은 무의식이 지배하는 꿈의 세계가 현실에서 용인되지 않는 비합리적인 모든 것을 허용하는 세계이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극의 초반, 크리스마스 파티가 끝난 발레 1막의 무대에는 마샤가 침대에 누워 잠자리에 드는 모습이 연출되었고, 막이 내리기 직전에는 마샤가 꿈속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과 작별 인사를 하며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한편 호프만의 동화에서 ‘판사이자 마법사’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이야기 속 사건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존재, 드로셀마이어가 등장한다. 이 인물은 모든 발레 버전에서 역시, 호프만의 원작처럼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연결해주는 캐릭터로 등장해 무대를 지배한다. 그러나 그리고로비치 버전에서 드로셀마이어의 역할과 성격은 이전의 버전에서와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가령 프티파의 버전에서 드로셀마이어는 호두까기 인형을 클라라에게 선물한 마법사로서 그녀를 경이로운 환상 세계 속으로 인도한 주요 인물로 등장한 반면, 그리고로비치의 버전에서 그는 마법사가 아닌 판사라는 직업을 가진 남매의 대부로 등장한다. 프티파가 무엇보다 환상성을 배가시키기 위해 원작에 설정된 드로셀마이어의 현실적 삶을 배제하고 마법사로서의 역할만을 부여했다면, 그리고로비치는 그와 반대로 현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마법을 부리는 초월적 존재가 아닌 현실 사회 속에 실재할 법한 인심 좋은 남성의 캐릭터로 등장시켰다는 것이다. 물론 그리고로비치 버전에서 역시 판사 드로셀마이어가 마법사의 복장을 한 채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는 마법사가 아닌 어린이를 위해 분장한 어른, 마술사의 모습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프티파의 드라마틱한 전개 방식을 보존함과 동시에 꿈이라는 미적 장치를 통해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요소, 즉 환상성과 현실성을 엮어낸 그리고로비치의 버전은 마침내 러시아 무대에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1966년 이후로는 볼쇼이 발레단의 고정레퍼토리로 선정되어 오늘날까지 꾸준히 상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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