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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러시아 재즈 음악의 선구자들: 파르나흐와 테플리츠키
분류음악
국가 러시아
날짜2020-02-02
조회수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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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다시피, 재즈는 아프리카 민속 음악과 유럽 음악의 결합으로 미국에서 탄생한 대중음악의 한 장르이다. 재즈의 출발은 17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아프리카의 인적 자원으로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수출된 흑인 노예의 후예들은 아프리카 민속 음악의 감성을 서글픈 선율로 노래했다. 이러한 흑인들의 아프리카 음악은 백인들이 형성한 유럽음악의 영향하에서 흑인 특유의 감성을 반영한 죄수의 노래, 노예의 노래, 노동가 등으로 발전해 나갔다. 19세기 말, 노예 해방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박탈당했던 몸과 정신의 자유를 회복하게 되자, 흑인들은 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역사와 삶의 애환을 소박한 형식으로 표현했고, 미국 남부 흑인 피아니스트들 사이에서는 역동적인 양식의 피아노 음악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재즈 음악의 빛나는 역사가 출발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결국 재즈는 사회의 시대성을 반영하며 발전한 대중음악의 한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유럽과 아프리카라는 이질적인 지역 문화의 만남으로 탄생한 재즈 음악이 국제적 물결을 타고 소련 사회로 흘러 들어간 시기는 1920년대 초반이다. 소수의 선구적인 재즈 음악가들에 의해 유입, 형성, 확립된 러시아 재즈는 오늘날 그들의 발자취와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낸 퓨전 재즈, 컨템퍼러리 재즈로 이어져 현대 러시아 대중문화의 한 가지 축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러시아에 재즈를 유입, 정착시킨 음악가들은 누구인가?
    

발렌틴 파르나흐

러시아어 ‘Джаз’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22년의 일로, 당시 러시아어로 발간되던 베를린 잡지 <Вещь>에 발렌틴 파르나흐(В. Парнах)라는 음악가의 글이 실리면서부터이다. 파르나흐는 20세기 초반 프랑스를 오가며 시인이자 번역가, 음악가이자 무용수로서 활동한 인물로, 예술사에서 그는 프랑스에 거주하는 러시아 이민자 문학 그룹 <Палата поэтов>의 창립자이자, 러시아 재즈 음악의 선구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1891년 7월, 러시아 남서부에 위치한 타간로크의 어느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한 그는 19세에 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예술과 인문학에 대한 관심으로 역사-어문학부로 전과해 학업을 이어갔다. 그 무렵 미하일 그네신(М. Гнесин)의 지도하에 음악 공부를, 메이에르홀드(В. Э. Мейерхольд) 스튜디오에서 극예술 공부를 병행했다. 또한 그는 알렉산드르 블록(А. Блок)의 권유로 시 창작에 몰두하기도 했는데, 그가 탄생시킨 시는 당시 메이에르홀드가 발간하고 있던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Любовь к трем апельсинам>(№3,1914) 잡지에 게재되기도 했다. 이처럼 파르나흐가 20세기 초반 러시아 예술계를 주도했던 각 분야 예술가들과 이어갔던 학창 시절의 교류 관계는 훗날 그의 실험적 음악 구상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듯하다.

1915년 6월, 스톡홀롬과 런던을 거쳐 프랑스로 떠난 그는 문화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6년간 체류했다. 당시 그는 아라비아와 팔레스타인, 스페인, 이집트 등을 두루 여행하면서, 고대와 중세 유대문화와 예술의 흔적을 연구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유럽 도서관과 역사 기록 보관소를 찾아다니며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로 작성된 유대인의 시를 찾는 데 할애했다. 또한 파리에서 그는 일랴 에렌부르그(И. Эренбург), 도비드 크누트(Д. Кнут), 알렉산드르 긴게르(А. Гингер), 보리스 폴라프스키(Б. Поплавский) 등과 함께 러시아 이민자 문학 그룹 <Палата поэтов>를 결성하기도 했는데, 그들은 다양한 논문, 번역, 에세이 등을 프랑스 아방가르드 정기간행물에 게재하며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그렇게 지내던 1921년 7월의 어느 날, 파리의 모던카페 <트로카데로Трокадеро>에서 파르나흐는 그의 앞날을 뒤바꾸어놓을 밋첼 루이스(Mitchell Lewis)의 앙상블 재즈 연주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전에 들어본 적 없던 혁신적인 음색과 멜로디, 즉흥연주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급기야 그는 밴조, 색소폰, 페달이 달린 드럼 등 밴드 활동에 필요한 악기들을 구입했고, 1922년 8월 ‘러시아 최초 재즈 밴드 결성’이라는 야심찬 포부를 안고 러시아로 귀국했다. 당시 이즈베스티야는 <베를린, 로마, 마드리드, 파리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새로운 음악, 시, 춤을 우리에게 보여줄 파리의 문학 그룹 대표 발렌틴 파르나흐가 모스크바에 도착했다>며 그의 입국 소식을 신문 1면에 보도하기도 했다. 도착 직후 그는 트베르스코이 불바르에 위치한 게르첸 하우스의 작가 기숙사에 정착해, 1924년까지 약 2년간 만델쉬탐 부부의 가까운 이웃으로 거주했다.

 

<발렌틴 파르나흐의 재즈 밴드>

최초 앙상블 구성원들은 파르나흐와 유럽에서 함께 활동했던 시인, 음악가, 안무가들이었고, 이들은 한 달간 악기 연습에 몰두했다. 이렇게 탄생된 소비에트 최초 재즈 앙상블은 1922년 10월 1일 데뷔 무대에 섰다. 초연 당일, 시나리오 작가 예브게니 가브릴로비치(Е. Габрилови), 배우이자 화가 알렉사드르 코스토몰로츠키(А. Костомолоцкий), 메치슬라프 카프로비치(М. Капрович), 세르게이 티젠가이젠(С. Тизенгайзен)이 중앙 극예술 전문학교(현 기치스) 무대 위에 모였다. 가브릴로비치는 앙상블에서 피아노를 연주했고, 코스토몰로츠키는 드럼을, 카프로비치는 섹소폰을, 티젠가이젠은 콘트라베이스와 베이스드럼을 맡았다. 첫 콘서트에서 파르나흐는 관객들에게 재즈라는 장르의 음악적 경향, 즉 이질적인 문화, 각각 자체적으로 꽃을 피운 지역문화의 전통을 하나의 예술로 결합한 음악 장르라고 소개했다. 피아노 연주자 가브릴로비치는 그들의 최초 연주에 대해, 파르나흐의 설명을 증명하듯이, 공연장 전체가 악기들이 뿜어내는 이국적 음색과 정취로 가득 차 있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그들의 연주는 열정적이었다. 당시 무대를 본 메이에르홀드는 자신의 연극을 위한 재즈 음악 제작을 제안했고, 실제로 그의 1922년 작품 <너그러운 오쟁이진 남편Великодушный рогоносец>에서는 폭스트롯 멜로디가 사용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1923년 5월, 모스크바 전 러시아 농업 및 수공업 박람회 축제 퍼레이드에서, 그리고 1924년 여름 코민테른 제5회 대회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당시 소비에트 언론은 그들의 활동에 대해 ‘재즈 밴드가 국가적 행사에 참여한 것은 역사상 처음으로, 이는 그때까지 서양에서도 전례 없던 일’이라며 보도하기도 했다. 당시 파르나흐 재즈 밴드의 출현은  단순히 러시아 음악계에 새로운 그룹이 등장했다는 의미를 넘어, 러시아 대중음악계에 새로운 음악 장르의 출현을 의미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발렌틴 파르나흐>

레오폴드 테플리츠키

레오폴드 테플리츠키(Л. Теплицкий)는 카렐리야에서 가장 유명한 문화계 인사 중 한 명이다. 카렐리야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창립자로 널리 알려진 그는 파르나흐와 함께 러시아 재즈 음악 형성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1890년 3월, 우크라이나 예카테리노슬라브 근교에서 태어난 그는 11명의 형제 중 차남으로서 12세부터 가정의 경제에 도움이 되어야할 상황에 처해 있었다. 우연한 계기로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알게 되어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 음악학교에서 3년간 공부했으나, 곧 학업을 중단하고 가족 부양을 위해 노동의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던 중 1908년 금서 유포 혐의로 얄타에서 체포되어 1년의 시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출소 후 음악공부를 다시금 시작해 1914년 하리코프 음악 대학을 졸업했고, 1915년에는 피아노 전공으로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해 학업을 이어갔다. 그러나 손 부상으로 시험을 치를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그는 이론 및 작곡과로 전과했다. 테플리츠키는 이곳에서 공부하는 동안 페테르부르크 영화관 <몰니야Молния>, <륙스Люкс>, <그란드Гранд>의 무성 영화를 위한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1926년 인민위원회는 무성 영화음악 연구를 위해 테플리츠키를 미국 필라델피아로 보냈다.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세계 농업 전시회(1926) 무대에서 5중주 음악을 연주했으나, 우연한 기회에 폴 화이트만(Paul Whiteman) 오케스트라가 지휘하는 재즈 교향곡을 경험하게 되었고, 자신의 꿈과 진로를 변경하기에 이른다.

테플리츠키는 소련으로 돌아온 직후, 전문 음악가들로 구성된 ‘콘서트를 위한 재즈 밴드’를 최초로 조직했다. 재즈 음악을 작곡하면서 클래식 음악들, 이를테면 19세기 이탈리아 거장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나 프랑스 음악가 샤를 구노(Charles Gounod)의 선율을 접목시켰는가 하면, 미국 현대 음악가 조지 거쉬윈(George Gershwin), 러시아계 미국 음악가 어빙 벌린(Irving Berlin)의 곡들을 연주하기도 했다. 이처럼 클래식과 재즈, 고전과 현대적 양식을 넘나드는 테플리츠키를 ‘재즈 유희를 선보인 러시아 최초의 음악가’라고 말한 레오니드 우쬬소프(Л. Утесов)의 말대로, 그는 1930년대 레닌그라드 재즈 전문가로서 클래식계와 대중음악계 전반을 누비며 활동하고 있었다.


<테플리츠키 재즈 밴드의 초연 포스터>


그의 첫 재즈 콘서트는 1927년, 음악가이자 작곡가 이오시프 쉴린게르(И. Шилингер)의 ‘재즈 밴드와 미래의 음악’ 강연과 함께 진행되었다. 특별 게스트 멕시코 출신 가수 코레티 알레 티즈(Coretti Arle-Tiz)와 함께한 낯설고도 감미로운 음악은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밴드의 성공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는데, 이는 재즈를 바라보는 소비에트 사회의 태도가 긍정적이지만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막심 고리키(М. Горький)는 1928년 프라브다지에 기고한 글 <О музыке толстых>에서 재즈를 겨냥했고,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음악가 협회는 러시아 재즈 연주자들의 활동을 비판했다. 소비에트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양식의 서구 음악은 ‘부르주아 제도의 산물’로 여겨졌고, 재즈는 소비에트 청중들에게 허용될 수 없는 음악으로 치부되었다. 1930년, 테플리츠키는 간첩으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 이유는 미국 여행 당시 그가 유대인 학살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친척들을 만났다는 이유였다. 그는 2년 후 석방되었지만 더 이상 레닌그라드에 머물지 않고 페트로자보드스크로 이주했다. 그의 나이 43세의 일이었다.

1933년 그는 카렐리야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임명되었지만, 클래식 오케스트라와 함께 재즈 프로그램을 연주하며 재즈 뮤지션으로서 활동을 지속했다. 1936년 테플리츠키는 새로운 앙상블 <칸텔레Кантеле>를 조직해 카렐리야 서곡을 작곡했고, 이 곡은 카렐리야 예술축제의 일환으로 레닌그라드에서 선보여졌다. 그리고 테플리츠키 앙상블은 1936년 전 소비에트 민중예술 라디오 페스티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영광을 안았다. 그 후로도 그는 남은 여생을 페트로자보드스크에서 보냈다. 그는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페트로자보드스크 음악학교의 학생들에게 그의 음악적 지식과 경험을 전달하며 후학양성에 힘썼다. 그의 지도하에 성장한 음악가들로는 겔메르 시니살로(Г. Синисало), 빅토르 구드코프(В. Гудков) 등이 있으며, 러시아 재즈 거장 테플리츠키가 남긴 업적과 유산은 아직까지 매년 페트로자보드스크에서 개최되고 있는 <별들과 우리Звезды и мы> 재즈음악 페스티벌을 통해 보존, 기념되고 있다.


<레오폴드 테플리츠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럽과 아프리카라는 이질적인 지역 문화의 만남으로 탄생한 재즈 음악은 1920년대에 이르러 두 명의 재즈 거장들에 의해 소련 사회로 흘러 들어갔다. 발렌틴 파르나흐와 레오폴드 테플리츠키를 주축으로 초기 소련 재즈 뮤지션들은 정통 재즈, 클래식 재즈 등 그들의 기량과 음악적 취향에 따라 러시아 현대 음악의 한 방향을 구축해 나갔다. 재즈의 역사는 각 시대 재즈 음악가들에 의해 개발된 새로운 연주법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재즈 음악이 최초 유입된 지 100년 가량 흐른 오늘날 러시아 재즈는 퓨전 재즈, 컨템포러리 재즈의 형식으로 그 외형상 변형을 거듭하며 21세기 러시아 대중음악의 한 갈래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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