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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마티스를 사랑한 남자, 세르게이 슈킨 (С. Щукин)
분류회화
국가 러시아
날짜2019-11-01
조회수8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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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에 러시아 내에 등장한 다수의 컬렉터들 대부분이 상인 혹은 기업가였다는 점은 매우 특이한 현상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이들 중 혹자는 일찍이 미술품을 새로운 거래 대상물로 보고 이를 발굴하여 자신의 사업을 성장시키기 위한 미래의 주춧돌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말 그대로 ‘순수한’ 개인의 취미와 미술작품에 대한 열정으로 컬렉션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 시기 상인계급 혹은 기업가 출신의 대표적 컬렉터로 파벨 트레티야코프(П. Третьяков)와 사바 마몬토프(С. Мамонтов)를 꼽을 수 있다. 아마도 이들 두 기업가-컬렉터가 세기말에서 세기 초를 아우르는 러시아 대규모 컬렉션의 위대한 두 축을 형성해냈다는 점에 이견을 표할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에 더하여 19세기 말 러시아 컬렉터와 그의 컬렉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앞서 언급한 두 명의 거대 컬렉터 외에 세르게이 슈킨(С. Щукин)이라는 인물에게도 한 번쯤 관심을 가져봤음 직하다.

세르게이 슈킨은 상인이자 구교도 출신 가문의 4남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세르게이 슈킨의 아버지 이반 슈킨을 비롯하여 슈킨 집안사람들은 대대로 컬렉터로서의 성향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본격적인 회화 컬렉션은 세르게이 슈킨의 세대에 이르러 시작되었으며, 그 이전의 세대는 주로 은세공품에서 고서적, 희귀한 가재도구와 몇몇 고가구 등 대부분 회화 작품보다는 소위 ‘분더 카머(Wunder Kammer)’에 어울리는 ‘진귀한 물건 수집’ 수준에 그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들 가족들 사이에서 암묵적으로 동의되어 내려오는 전통이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자신들의 컬렉션은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타인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세르게이 슈킨 역시 이러한 가족적 전통에 입각하여 자신의 컬렉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포한 바 있다.

“나는 나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나라와 민중을 위해 컬렉션을 행한다. 내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내 컬렉션은 나의 나라에 남아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슈킨 역시 처음부터 예술에 대한 식견과 안목을 지닌 컬렉터는 아니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윈 뒤에, 가업에 별 관심이 없던 형제들을 뒤로하고 가업을 계승한 세르게이 슈킨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림보다는 사업과 관련된 일이었다. 가끔씩 그의 손에 들어오는 그림 역시 예술을 사랑해서 수집한다기보다 그저 방 벽면 한쪽을 장식할 용도로 사용되곤 했다. 심지어 1882년에 트루베츠코이(Трубецкой) 공후 가문의 저택을 인수하자마자, 저택 내에 소장되어 있던 무기와 이동파 화가들의 그림을 한 점의 망설임 없이 내다 팔고, 노르웨이 화가들의 풍경화 몇 점과 맞바꾸기도 했다. 그러던 중 그가 예술 작품으로서 회화에 눈을 뜨며 진정한 컬렉터로서의 길을 걷게 된 것은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을 만나면서부터이다.

그는 파리 방문을 통해 프랑스 후기 인상파 화가에 속하는 찰스 코텟(C. Cottet)과 루시앙 시몽(L. Simon) 등의 작품을 구매했고, 이것이 그의 컬렉션의 시초가 된다.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모네와 르느와르, 드가, 피사로 등의 그림을 차곡차곡 자신의 컬렉션 목록에 올리기 시작한다.

                                                                            
                                                                            <세르게이 슈킨>


슈킨의 컬렉션과 별개로 그가 그림을 선택했던 기준은 상당히 엉뚱하면서도 직관적이다. 그의 그림 구매 원칙을 한 마디로 직역하면, “쇼킹하면 사라!”이다. 이러한 슈킨의 말은 이미 그 자체가 쇼킹함이다. 게다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나라와 민중을 위해 컬렉션을 행하겠다는 사람의 신념치고는 그 울림이 다소 가볍게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볼 때, 어쩌면 가장 단순해보이는 그 원칙, “쇼킹하면 사라!”는 원칙은 당시 지루함을 넘어 다소 식상하게까지 여겨지던 비판적 리얼리즘 양식에서 벗어난 앞선 미술의 형식, 미래의 미술을 감별해 낼 줄 알았던 슈킨만의 안목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당시 러시아인들에게 매우 생소한 인상주의 화가의 그림 중에서도 상당히 ‘센’ 화풍의 그림을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슈킨의 주변에서는 하나같이 그의 ‘난해하고’ ‘이상함’을 넘어서 ‘불편함’에 이르는 그의 취향을 두고 수군대곤 했다. 슈킨이 구매한 르누아르와 피카소의 그림은 아마도 19세기 말 러시아인들의 눈에는 여전히 낯선 그림이었던 듯싶다. 그는 르누와르와 피카소의 작품을 다름 아닌 자신의 저택 내에 마련된 작은 가정 교회에 걸어놓았는데, 심지어 이를 두고도 사람들 사이에 이런저런 말들이 오갔다. 르누와르는 그렇다 쳐도 당시 일반인들이 보기에 피카소의 그림은 아직까지 눈에 설은 그림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슈킨이 구매한 피카소의 그림은 대부분 본격적인 입체주의가 시작되기 이전의 초기작에 해당하기에 형식 자체보다는 뭔가 다른 맥락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구교도 집안 출신인 그가 <압생트를 좋아하는 자>와 같은 ‘불온한’ 그림을 감히 성스러운 교회 공간 내에 걸어놓았다는 괘씸죄가 더 심하게 작용했을 것이고, 슈킨을 두고 ‘죄 많은 자’라는 말이 나온 것 역시 이런 맥락 속에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압생트를 좋아하는 자, 피카소 作>

슈킨에게 ‘간택’ 받은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작품의 쇼킹함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그가 직접 구매한 고갱 작품의 일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어느 날 슈킨은 세간 사람들이 소위 ‘문제적’이라고 일컫는 그림에 속하는 고갱의 ‘타히티’ 시리즈 일부를 구매했다. 그리고 마치 그림과 맞대결을 벌이기라도 하듯이 무려 반년에 걸쳐 자신의 방안에 앉아 하염없이 고갱의 ‘문제작’을 바라봤다고 한다. 슈킨은 이런 방식으로 그림과 나름대로 ‘친밀도’를 형성한 뒤에야 비로소 컬렉션 전용실로 그 문제작을 이동시켰다고 한다. 슈킨 자신에게도 어쩌면 고갱의 ‘쇼킹한 문제작’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미학적 발견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선뜻 다가서기 힘든 ‘센’ 그림이었던 듯싶다.
 

                                                                               <우상, 고갱 作>


슈킨은 프랑스 화가들 작품 중에서도 ‘인상주의’ 화파에 속하는 작가들의 그림을 선호했고, 그중에서도 특별히 모네와 마티스의 작품을 아꼈다. 모네의 작품은 슈킨이 처음으로 구매한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이자, 그의 본격적인 컬렉션을 알린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각별하다. 마티스의 경우, ‘러시아의 마티스’라고 불리는 38점의 ‘슈킨 특별 컬렉션’이 존재할 정도로, 슈킨은 마티스의 그림을 전문적으로 수집한 단순 컬렉터 그 이상의 컬렉터라 할 수 있다. 그는 오늘날 마티스를 대표하는 작품 대부분을 의뢰하고 수집, 전시하며 일찌감치 마티스의 진가를 알아본 미적 통찰력과 ‘혜안’을 지닌 진정한 컬렉터였다.

슈킨이 수집한 마티스 작품 중 거의 마지막 컬렉션에 해당하는 <춤>과 <음악>은 이미 제작된 작품을 구매한 것이 아니라, 슈킨의 특별 주문으로 제작된 그림이었다. 슈킨이 해당 작품을 의뢰한 1910년 전후의 시기에, 마티스는 프랑스 파리에서 ‘야수파’라는 다소 폄하된 타이틀의 화파를 대표하는 화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마티스가 그의 그림을 두고 ‘짐승이나 다름없다’라고 말한 루비 보셀의 악평을 극복하고, 20세기 초반 파리 화단의 ‘맹수’로 성장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사람은 자국의 비평가나 컬렉터가 아니라, 바로 러시아라는 타국의 컬렉터 세르게이 슈킨이라 할 수 있다.

                                                                          <붉은 방, 마티스 作>


마티스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 <붉은 방>을 비롯하여 <춤>과 <음악>의 원본은 현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에르미타쥐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에르미타쥐에 입성하기에 앞서, <붉은 방>을 제외한 소위 ‘푸른 시리즈’에 해당하는 마지막 두 작품은 모두 슈킨의 저택 일부를 장식하기 위해 특별 주문되어 자신의 임무를 다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임무를 맡기 위한 여정도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춤>과 <음악>을 주문하기 이전부터 이미 오랜 시간 동안 마티스와 친분을 쌓아왔던 슈킨은 자신의 저택 일부를 장식하기 위해 마티스에게 특별히 3점의 패널화를 의뢰하게 되는데, 그중 두 작품이 바로 문제작 <춤>과 <음악>이다. 마지막 3번째 패널화에 해당하는 <해수욕, 혹은 명상>은 미완성 상태로 남겨졌고 현재 화가의 초기 스케치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이 패널화 시리즈에 얽힌 사연을 거슬러 되짚어나가다 보면, 슈킨이 주문한 총3점의 패널화 중 <춤>과 <음악>만 원작이 남아있는 것이 이해가 될 것도 같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슈킨은 자신의 저택에 위치한 출입구 전면 계단을 장식하기 위해 마티스에게 특별히 패널화 제작을 의뢰했다. 당시 슈킨은 춤과 음악을 소재로 뭔가 우의적인 내용을 담은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슈킨에게 작품 제작 의뢰를 받은 마티스 역시 매우 기뻐했는데, 비록 화가를 천직으로 삼아 일하고 있었지만, 그 역시 약간의 재능만 더 있었다면 붓과 팔레트를 집어 던지고 춤꾼으로 나섰을지도 모를 정도로 춤을 좋아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마티스는 “춤이야말로 삶이자 곧 리듬이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춤에 대해 남다른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마티스는 자신의 작품이 저택 입구에서 들어왔을 때 보이는 계단에 위치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이제 막 집에 들어오는 자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 위해 1층계단 공간을 위해 <춤>을, 2층 계단 공간을 위해서는 <음악>을 준비했다고 한다.

하지만 작품의 주문자인 슈킨의 저택으로 이동하기 전, 파리에서 가진 전시회에서 먼저 선보인 작품 <춤>과 <음악>을 향해 쏟아진 것은 찬사가 아닌 관람객의 날 선 비평뿐이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서툴게 그리다 만 선 같은 윤곽, 사용된 색채는 고작 파랑, 주황, 녹색 3가지, 어수선한 붓질, 게다가 벌거벗은 몸뚱이라니... 당시 관객의 시선에 비춰볼 때 충분히 혹평의 대상이 될 만했다. 게다가 파리에서는 이미 이 문제작들이 누구의 소유가 될 것인지, 즉 작품의 주문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는 상태였고, 과연 슈킨이 자신이 직접 주문한 이 ‘그리다 만 그림’을 가져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내기까지 벌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마침내 작품을 주문한 당사자 세르게이 슈킨이 파리에 왔고, 자신이 의뢰한 작품을 마주친 슈킨 역시 한동안 아연실색하여 침묵을 지킨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아마도 그나마 인물선이 다소 정돈되고 주제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춤>보다, 뭔가 어설픈 미완성작처럼 보이는 <음악>이 슈킨을 더 당황하게 했을 듯싶다. 결국 슈킨은 작품 인수를 거부한 채 모스크바로 돌아갔고, 내기꾼들은 환호를 외쳤다. 주인을 잃은 작품과 함께 파리에 남겨진 마티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의기소침해져서 비평가와 사람들의 조롱을 참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슈킨의 안목은 남달랐다.

모스크바로 돌아가던 도중, 자신이 버려두고 온 그림을 놓고 몇 번의 장고를 거듭하던 슈킨은 결국 마티스에게 급전을 보내게 된다.

“이보게 친구, 화내서 미안하이. 내가 정말 여러 차례에 걸쳐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동안, 내 소심함과 부족한 용기에 창피함을 감출 수 없었네. 싸워볼 생각도 하지 않고 전쟁터에서 떠날 수는 없네. 내가 주문한 물건을 가져가겠네.”

마티스의 작품을 두고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온 세간의 조롱은 결국 슈킨의 전투력을 끌어올렸고, 그는 세인들의 입방아보다 자신의 안목에 더 확신을 뒀고, 그것을 입증해 보이고 싶었던 듯하다. 결국 슈킨은 자신이 주문한 작품을 진즉에 예정해 놓았던 자리에 당당히 걸어놓게 된다. 비록 혁명이 일어난 이후, 슈킨은 파리 망명길에 오르고 그의 컬렉션 대부분은 국가 재산으로 몰수되어 모스크바의 국립 푸시킨 미술관과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쥐 박물관에 보관되었지만,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은 슈킨의 남다른 안목에 의해 발굴된 마티스와 모네, 고갱과 피카소 초기작을 보기 위해 러시아로 발걸음하고 있다. 물론 슈킨이 돌연 자신의 안목을 확신하며 다시 자신의 집으로 들인 마티스의 작품 <춤>과 <음악>에 대해 쏟아졌던 세간의 조롱은 찬사로 바뀐 지 오래다. 그리고 슈킨은 그가 공표했던 컬렉션의 목적, 즉 “나의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내 컬렉션은 나의 나라에 남아있어야만 한다”라는 자신의 신념과 약속을 충실히 지켜냈으며, 이로써 자신의 개인적 취미를 위한 자기 만족적 컬렉션, 혹은 자산 증식의 수단이나 과시의 수단으로서 컬렉션이 아닌, 자신의 이웃과 자신의 국민을 위한, 더 나아가 전 세계인에게 여전히 그 의미가 유효한 귀중한 인상파 컬렉션을 완성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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