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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미술관이 살아있다: 가상현실에서 만난 말레비치와 곤차로바
분류회화
국가 러시아
날짜2019-05-15
조회수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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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말, 학기 중에도 불구하고 잠시 러시아에 다녀올 일이 생겨서 중간고사 기간에 부랴부랴 짐을 챙겨서 모스크바 행 비행기에 올랐다. 유학을 마친 이후 러시아를 방문하게 되면 대부분 여름 방학이나 겨울 방학 기간을 이용하곤 했기에, 이번 출장은 그 시기도 특별했지만, 봄에 러시아를 방문하는 일은 흔치 않아서 더욱 설레는 맘을 안고 모스크바로 향했던 것 같다.

모스크바의 봄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도착한 이후 하루 이틀 정도는 봄을 문턱에 두고 다소 쌀쌀한 날씨를 보였는데, 셋째 날부터 갑자기 초여름 날씨로 바뀌더니 모스크비치들 역시 화려하게 나풀대며 살랑이는 여름옷으로 갈아입고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5월 초 노동절 연휴와 전승기념일을 앞두고 모스크바의 거리와 건물들 역시 한껏 멋을 부리며 단장에 여념이 없었다. 이렇듯 생기 넘치는 거리 풍경에 잠시 넋을 빼앗긴 채 모스크바의 이곳저곳을 카메라 화면에 담아내다가,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내 미술관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모스크바에 오면 가장 먼저 들리곤 하는 트레티야코프 갤러리 구관과 신관을 이번에도 어김없이 찾아갔다. 특별히 고리키 공원 맞은 편에 위치한 신관 건물에서는 <일리야 레핀> 특별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트레티야코프 갤러리 홈페이지 입장권 구입 화면

<레핀전>의 경우, 사전 예약을 통해 미술관 입장 인원을 통제하고 있었다. 트레티야코프 갤러리 홈페이지 티켓 구입 섹션에서 자신이 관람하고 싶은 전시와 시간을 선택해서 전시 티켓을 구입할 수 있게 해 놓았고, 마치 영화관 티켓처럼 몇 시에 구입가능한 표가 몇 장 남았는지까지 실시간으로 친절하게 알려준다. 30분 단위로 관람객을 190명으로 제한하여 티켓을 발행하는 것으로 확인되는데, 암표가 성행하고 부르는게 곧 값이었던 과거와 달리 영화관, 공연장은 물론 미술관까지 온라인을 통한 실시간 예매가 가능하고 티켓 현황 정보를 알 수 있는 실로 놀라운현실에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이 모든 사실을 확인하고도 무슨 생각이었는지, <레핀전> 표를 예매하지 않고 트레티야코프 갤러리에 배짱 좋게 들어가서 레핀전 표를 요청했다. 실은 만일 현장에서 입장권을 구입하는 것이 불가해도 인터넷으로 남은 표를 현장에서 예매하고, 시간이 남으면 다른 전시를 먼저 보고 오면 될 것 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조금, 아주 조금은 여기가 다른 나라도 아니고 러시아이기에 왠지 뭔가 웃돈을 더 내면 현장에서도 표를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기대는 나만의 기대고 끝나고 말았다. 현장에서는 갤러리 홈페이지에 게시된 내용처럼 현장에서는 당일 입장권 판매를 하지 않았고, ‘웃돈을 더 지불하고 살 수 있는 상황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 계획했던대로 인터넷에 접속해서 표를 구하려 하니, 이번에는 핸드폰이 말썽이다. 예전에 쓰던 낡은 아이폰5를 현지용 서브폰으로 가져갔는데, 인터넷만 접속하면 배터리가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으로 팍팍 줄어들었다. 결국 예매 도중에 핸드폰이 깊은 잠에 빠지게 되는 불행과 맞닥뜨리게 되었고, 그렇게 <레핀전> 관람은 그냥 물건너 가버리게 되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상설 관람권과 더불어 <레핀전>과 함께 신관 갤러리에서 꼭 보려고 마음 먹고 있었던 <가상현실전: 말레비치, 곤차로바, 쉬쉬킨> 표를 사기 위해 다시 매표소 앞으로 다가섰다

                                        전시 <박물관이 살아있다> (제주



                                   <착시현상 박물관> 내 전시 (모스크바, 아르바트


급하고 반가운 마음에 <가상현실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미처 읽지 않고 방문한 탓에 처음에는 몇 해 전 한국 몇몇 전시관에서 진행하며 큰 인기를 끌었고, 지금도 제주 및 서울 인사동 전시장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종의 착시 현상을 이용한 명화 패러디 정도로 오해 아닌 오해(?)에 사로잡혀 있었다. 실제로 러시아 내에서도 이런 착시 현상을 이용한 몇몇 전시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 내에서 전시되는 착시 현상이용 전시는 아직 다소 조잡한 형태가 많기에, 트레티야코프에서 진행하는 전시는, 게다가 곤차로바와 말레비치의 이름을 걸고 하는 전시는 좀 다르지 않을까라는 약간의 기대감과 오해에 사로잡혔던 것은 사실이다. 혹은 곤차로바와 말레비치의 작품이 공간을 재구성하고 그 재구성 과정에서 생겨난 균열을 통해 새로운 느낌을 창조하는 것이 대부분이기에, 말레비치 작품 속에 존재하는 색색깔의 네모와 세모, 동그라미 형태의 오브제들이 내 눈앞에서 둥둥 떠다니거나, 곤차로바 작품 속에서 위아래로 짓눌린듯한 인물들이 화폭을 찢고 나오는 형태가 연출될 거라는 나름 예술적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표를 구입했다. 쉬쉬킨의 경우, ‘착시 현상을 일으킬만한 콘텐츠가 숲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 같다는 선입견에 짓눌리는 바람에, 체험 작가 명단에서 쉬쉬킨을 과감히 제외하고, 나머지 두 명 작가의 체험권을 구입하여 당당하게 전시관 입구로 향했다.

                                      <가상현실전: 말레비치, 곤차로바, 쉬쉬킨> 홍보 영상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가상현실전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체험이었고, 기대 이상으로 매우 인상 깊고 흥미로운 추억으로 남게 되었다. 가상현실을 체험하기 위해 난생 처음으로 투박한 가상현실 안경을 착용했다. 그리고 양손에는 마치 권총처럼 생긴 조이스틱을 꼭 쥐고, 가상현실 속에 마련된 말레비치의 작업실로 걸어 들어갔다. 기껏해야 착시 현상을 이용한 패러디 성향의 전시이거나, 작품 속 오브제가 내 주변에 떠다니거나, 아니면 작품 속 인물이 내 옆에 와서 나란히 서며 포즈를 취할 것이라는 나의 뻔한상상력은 보기 좋게 무너졌다.

물론 작품 속 오브제가 내 주변에 놓이기는 했다. 하지만 가상현실 체험 시간 동안 그 오브제는 나의 손길에 의해 다시 새로운 장소에 놓이게 되었다. 양손에 든 조이스틱으로 가상현실속 아틀리에 책상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네모와 세모 조각을 집어들고 화폭 여기 저기에 옮겨 놓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배열이 어느 정도 끝나고 나니 이번에는 우측에 놓인 팔레트에 붓을 찍어 막대기에 색칠을 하라는 주문이 들어온다. 내가 막대를 배열하고 색을 부여할 때마다, 가상안경 속에 붙어있는 이어폰에서 말레비치처럼 네모를 평행과 수직으로 다양하게 교차해 보세요!”, “와우, 멋진 구성이군요!”, 혹은 너무 많은 오브제는 당신의 그림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오브제를 빼면 어떨까요?” 등등 칭찬과 질문, 조언이 쏟아져 나왔다. 처음에는 조이스틱을 사용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네모와 세모를 자꾸 화폭 아래로 떨어뜨리기도 했지만, 이내 요령이 생겨서 나름 그럴듯한 배치가 되었다. 이번에는 좀 더 정교한 구성에 대한 주문이 들어온다. 막대를 꺾거나 길이를 줄이거나 늘려서 다이나믹한 화면을 구성하는 요청이다. 고심 끝에 배치와 채색이 끝나고 작품(!)이 마무리될 무렵, 갑자기 눈 앞에 있던 네모 막대들이 하늘 위로 붕 날아오르더니 반대편 화폭으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 이제 화폭 앞으로 다가와서 작품 사진을 찍어보세요라는 안내문이 흘러나왔다. 화폭을 향해 몇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나는 더 이상 화폭 바깥의 관람자-창작자가 아니라, 화폭 안에 위치한 각양각색의 막대들과 함께 어우러진 원통형 인간으로 변모하여 창작자-오브제가 되어 있었다.

 

                              송정수 作 <말레비치의 막대와 나: 이 그림은 누가 그린 막대그림인가?>

 

사진은 총3장을 찍을 수 있는데, 마지막 작품 사진(?)을 찍기 직전 포즈를 취하는 장면에서 뭔가 평범하다는 생각에 한 쪽 머리를 갸우뚱 기울여보았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작품 <시녀들> 화폭 안에, 실제로는 당시 화폭 밖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자기 자신의 모습을 위치시키는 미학적 센스를 발휘한 벨라스케스가 떠올랐다. 말레비치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대표적 상징물인 원통형인간이자, 동시에 이기도 한 오브제를 작품 속에 집어넣으면서, 그 대상물에 나름 생명력과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는 원대한 꿈이 부풀어 오른 것이다.

완성하고 보니 한쪽으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 모습이 마치 내가 그린 이 네모 세모 그림은 말레비치의 모작인가, 아니면 말레비치의 원작인가?”라고 되묻는 것 같은 느낌이 연출되었다. 한편으로는 말레비치 그림 속에 들어온 또 다른 말레비치의 모티프-페르소나저 조형물은 무엇, 지금 나는 어디?” 이런 질문을 던지고,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VR 연출을 위해서 설치된 수많은 기계와 전선을 거쳐서, 그림 속 원통형 페르소나가 현실의 -송정수와 허공 속 어딘가의 지점에서 겹쳐지면서 현실과 가상현실 간의 경계를 지워버리는 듯한 나름 매우 흥미롭고도 나름 철학적인 장
면이 연출되었다.

                                          가상현실 속 <곤차로바 아틀리에> 체험 영상


이렇게 말레비치 체험을 마치고 이번에는 곤차로바의 작업실로 걸어 들어갔다. 곤차로바의 작품 체험은 좀 더 단순했다. 탁자와 배경이 미리 설정된 화폭 안으로 이젤 양옆에 놓인 물병, 물컵, 꽃과 과일, 지구본, 연필, 도자기 등 다양한 오브제를 끌어들여서 재구성하는 방식이었다. 나름 신중하게 물병과 꽃을 이리저리 배치해보고, 바나나와 포도를 넣었다 뺐다 하면서 당시 러시아 입체파 화가들이 모범적 선례로 삼았던 세잔의 다중 시점이 들어간 새로운 원근법을 화폭 내에 구현해보고자 노력했다

                                               송정수 作 <곤차로바의 새로운 정물화>

 
오브제를 좀 더 이리저리 옮겨보고 싶었지만, VR체험 시간이 임박해서인지 , 이제 구성을 마칠 시간입니다. 빨리 결정하고 채색을 시작하세요라는 안내 문구가 계속 나왔다. 반복되는 기계음의 재촉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허공에서 붓질을 시작했다. 당사자인 나는 붓이 터치되는 곳마다 색이 퍼져나가는 아름다운 광경을 가상현실속에서 경험하며 신이 나서 허공에 열심히 헛손질을 해댔지만, 아마도 옆에서 나를 지켜보던 또 다른 누군가는 실로 괴이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 작품 선택의 순간에 와서는 구도 보다 오히려 전체적인 색감에 더 이끌려 푸른 빛이 선명한 그림을 최종 선택했는데, 아무래도 나름 신경을 썼던 구도 위주의 그림을 선택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긴 한다.

어쨌든 가상현실이 시각예술 분야에 적용될 때 이런 체험과 더불어 모종의 에듀테인먼트가 가능하다는 점이 흥미롭고 신기할 따름이었다. 마치 미술관에서 진화된 포켓몬게임을 벌이는 느낌이랄까..?

이 전시의 기획을 맡은 트레티야코프 갤러리 총괄 디렉터 젤피라 프레굴로바의 말처럼, 이 전시의 핵심은 단순히 가상현실 체험, 혹은 유명 작가 작품의 모사나 재현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관람자-작가의 입장에서 곤차로바와 말레비치의 작업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복기하고, 그 과정을 통하여 그들의 작품과 작품 스타일을 기억하는 가운데 곤차로바와 말레비치의 작품의 가능성을 더 확장하는 것에 있다. 그래서 가상현실속에 마련된 아뜰리에서 이들의 작품을 체현하는 것은, 기존의 작가를 대체하거나 새로운 창조물을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작품에 좀 더 다가서고 그들의 작업을 이어나가는경험의 일환이 되는 것이다.

마침내 나의 시각으로 연장된나만의 말레비치, 나만의 곤차로바 체험작이 완성되었다. 혼자 가서 전시를 본 탓에 아쉽게도 내가 가상현실 안경을 쓰고 허공에서 하릴없이 손을 휘두르며 좋아하는, 3자가 보기에는 다소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는 장면을 담을 기회는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가상현실 체험장 앞에 마련된 모니터 속에 담긴 나의 따끈한작품 파일이라도 담아 가고 싶어서 가상현실 체험관 가이드에게 파일을 좀 받을 수는 없냐고 하니, 아쉽지만 그건 불가능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저작권 문제로 인해 파일을 배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저 그림은 말레비치의 모티프를 이용한 나만의 작품이건만... 말레비치나 워홀한테 가서 이 작품이 진정 니 작품이냐””라고 물어볼 수도 없는 상황이고, 난감하고 아쉬운 맘에 그렇다면 순서상 먼저 작업말레비치작품이라도 모니터에서 좀 키워서 다시 보여달라고 하니 예상했던 대로 역시 단박에 거절이다. 가끔씩 어떤 경우에는 과거와 달리 융통성을 발휘하는 듯하다가도, 당연히 이것도 되겠지라는 기대감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몇몇 경우를 맞닥뜨릴 때마다 습관처럼 내뱉는 한 마디를 소심하게 웅얼거린다. “, 역시 이런게 러시아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송정수 作 <곤차로바의 새로운 정물화>는 아직 큰 사이즈로 모니터에 남아있길래 냉큼 카메라를 들이대고 그림을 찍었다. 그리고 그 아래 쪽에 다행스럽게도 아직 남아있는 <말레비치의 막대와 나: 이 그림은 누가 그린 막대그림인가?>도 함께 카메라에 담아 므흣한 표정을 지으며 상설관 전시를 보기 위해 계단을 올라섰다.

                                           트레티야코프 갤러리 <가상현실전> 체험 결과물


막상 곤차로바와 말레비치 작품을 나만의방식으로 완성해내고 나니, 쉬쉬킨도 같이 체험해 보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쉬쉬킨의 경우 주로 러시아 숲속 풍광을 그린 작가라는 특성을 감안해 볼 때, 오히려 말레비치와 곤차로바와 유사한 작품 그리기체험은 다소 밋밋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는 쉬쉬킨의 작품의 경우, 오히려 나의 머릿속에 처음 떠올랐던 것처럼 일종의 착시 현상을 이용한 전시, 즉 내가 마치 영화 쥬라기 공원의 영상 속에 들어가 공룡과 함께 아프리카 초원을 거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쉬쉬킨 작품 속에 묘사된 거대한 수풀과 그 수풀을 뚫고 들어오는 빛줄기를 가상현실 세트장 속에 담아낸 뒤에 그 안을 거닐게 하는 방식으로 연출되었으면 더 큰 호응을 이끌어내지 않았을까 싶다. 아쉽게도 이 전시는 다가오는 61일자를 끝으로 일단락된다. 하지만 예상컨대, 조만간 더 흥미로운 VR 프로젝트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뜻밖의 경험과 작품을 획득하게 만들어 준 트레티야코프 갤러리 전시 관계자들이 올해 안으로 더 멋진 기획전을 내놓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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