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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러시아의 ‘에스트라다의 갈매기’ 아나스타시야 발체바
분류음악
국가 러시아
날짜2019-05-01
조회수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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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러시아 격동기에 유행한 ‘집시가요’는 노동자 계급과 귀족 상류 계층 등 많은 이들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도시의 노동자들은 선술집에서, 귀족들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집시가요의 격정적인 리듬에서 ‘문명’으로부터의 철저한 자유를 발견했다. 이러한 자유는 정치적인 자유와는 거리가 먼, 저 황량하고 광활한 스텝 지역에서 질주하는 마차 속의 야만인의 해방이면서 방탕하면서 야생적인 해방이었다.

인류가 오래전에 잃어버린 고대적 시원성에 대한 향수를 부르는 집시가요에 대한 러시아 인들의 폭발적인 열정은 집시가요를 부른 가수들에 대한 광적인 사랑으로 이어졌다. 그 당시 집시가요를 부른 유명한 가수 3인방은 아나스타시야 발체바(Анастасия Вяльцева/l871-1913), 바랴 파니나(Панина, Варвара Васильевна/1872-1911), 나줴즈다 플레비츠카야(Надежда Плевицкая/l884-1941)였다. 이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인기 있었던 가수는 <러시아 에스트라다의 갈매기>, <러시아의 신데렐라>라고 상찬을 받았던 아나스타시야 발체바였다.

                                      바랴 파니나                         나줴즈다 플레비츠카야


러시아 에스트라다의 슈퍼스타 탄생: 아나스타시야 발체바

1871년에 태어난 발체바는 제정러시아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 온 이후 본격적으로 손키(С. М. Сонки) 성악단체에서 노래수업을 시작했지만, 그녀의 무대인생의 첫 걸음은 16살(1887년)에 키예프의 렌체프스크(С. С. Ленчевск)의 발레단에서 단역으로 시작되었다. 그 이후 1893년 모스크바의 <아쿠바리움Аквариум>극단 , 팔마극단(С. А. Пальма), 페테르부르크의 <작은 극장 Малый театр>의 무대에 서면서 가수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 특히 <작은 극장>에서 공연할 때, 극장평론가들은 발체바의 대중적으로 호소력 있는 목소리와 잃어버린 고대의 ‘영원한 여인상’의 이미지에 주목을 했다. 그 시기에 제정러시아의 유명한 변호사 홀레프(Н. И. Холев)의 도움을 받아 상류사회로의 진출도 이루어 졌다.

                                                                    아나스타시야 발체바

발체바의 가수 경력의 눈부신 절정기는 1897년 모스크바의 극장 <에르미타즈Эрмитаж> 오페라 극단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물론 이 극장의 경영주인 수킨(Я. В. Щукин)이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 극장에서의 빛나는 성공은 그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었다. 특히 <에르미타즈> 극단의 첫 솔로 콘서트에서 부른 ‘집시가요’는 관객(대부분 남성)들로 하여금 자극적이고 격정적인 감정 및 도시 생활에서 오는 외로움과 달콤한 향수의 혼합된 고대의 원초적인 원시성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불러 일으켰다. 당연히 이 솔로 공연은 즉각적이고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었고 발체바는 ‘집시 가요’장르에 최적화된 가수로 명성을 얻었다,  이것에 대하여 발체바는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3 년 동안 나는 오페라 무대에 서지 않았는데, 그 시간 동안 더 수준 높은 예술 활동을 위해 좀 더 특별한 형태로 나의 목소리를 개발하기 위해 정진했다. 그 결과 저명한 극단 경영주인 슈킨(Щукин)이 나의 목소리를 들은 이후 즉시 나를 <에르미타즈Эрмитаж> 오페라극단의 비중 있는 역으로 나를 초대했다. 그 이후 나는 러시아의 유명가수 ‘발체바’가 되었다(я сделалась «Вяльцевой»).

가수로서 대성공을 거둔 이후 공연 및 음반 제작자들이 앞 다투어 발체바에게 아주 좋은 조건의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리고 발체바의 첫 번째 러시아 지방 순회공연은 그야말로 진정한 슈퍼스타의 탄생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지방공연 관객의 대부분을 홀려 버린 유명한 <발체바의 미소вяльцевская улыбка>는 러시아의 다양한 계층에서 많은 팬을 확보하였으며, 이러한 광팬들은 그녀의 노래를 듣고 ‘향수’에 젖어 눈물을 흘리고 한숨을 쉬었다.  항상 관객들의 빗발치는 요청에 의해서 발체바는 기본적으로는 10번 이상의 앙코르 노래를 불러야 했고 심할 경우에는 20번 이상 노래를 앙코르 공연으로 관객들에게 선사해야 했다.

대성공을 거둔 지방 지방공연과 페테르부르크에서의 콘서트 공연에도 불구하고 발체바는 모스크바 <에르미타즈> 극단에서 오페라에서 비중 있는 역할도 계속 소화했다. 발체바가 맡은 주요한 오페라 배역은 요한 스트라우스 (Johann Strauß II/1825-1899)의 오페레타 <집시남작Der Zigeunerbaron>의 자피역, 독일태생의 프랑스 오페레타 작곡가인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1819-1880)의 <아름다운 엘렌 La Belle Hélène>의 엘렌역,  오펜바흐 이후 프랑스의 대표적 오페레타 작곡가인 르코크(Charles (Alexandre) Lecocq/1832-1918)의 오페레타 <앙고부인의 딸 La Fille de Madame Angot>의 클레레타역이었다. 이러한 모스크바에서의 오페라 가수역할과는 별도로 간혹 페테르부르크의 가장 전통 있는 <마린스키 극장Маринский театр>에서도 오페라 공연에 참가 했다. <마린스키>에서 그녀가 맡은 오페라의 비중 있는 역할은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카르멘역,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의  암네리스역, 생상스의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Samson et Dalila>에서 데릴라역 등이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발체바가 오페라 극단의 가수로 무대 활동을 시작했지만 그녀의 엄청난 성공은 특별한 존재감을 보이지 않았던 페테르부르크의 오페라 <부파>공연을 통해서가 아니라 격정적이고 영혼의 해방감을 충만 시키는 ‘집시가요’를 주로 불렀던 에스트라다 공연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아나스타시야 발체바의 인기는 어느 정도였고, 동시대인들을 사로잡은 그녀의 매력은 무엇일까?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아나스타시야 발체바 인기는 어마어마했다. 특히 청중 규모 1500석의 쿠르잘(Курзал)에서 열리는 콘서트는 항상 대성황을 이루었고, 그녀의 목소리가 들어가 있는 축음기판은 그 당시 가장 많은 발매기록을 세우고 있었다. 발체바는 그녀만의 고유한 ‘발체바의 공연목록’을 창조했는데, 무엇보다도 알렉세이 타스킨( Алексея Таскин)의 반주와 함께하는 로망스와 노래, 그리고 발체바 스스로가 엄청나게 높게 평가한 미하일 스테인베르그(Михаил Штейнбер)의 작품들이 그 목록 안에 들어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곡은 <나는 당신을 기다렸어요 Я вас ждала>, <날아라, 날아라, 사랑의 꿈이여Лети, лети мечта любви>,  <내 맘대로 사랑에 빠지고, 내 맘대로 사랑을 그만두네> 였다. 이러한 대중적인 인기를 통하여 발체바는 평범하고 단순한 하녀에서 러시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유명한 여성이 되었고 동시에 러시아 귀족 상류층 살롱의 신화적인 존재도 되었다.

오랫동안 발체바를 사모한 작곡가 니콜라이 주보프(Николай Зубов)는 발체바를 위해 많은  집시가요를 작곡했다. 특히 <나는 너를 사랑해 Люблю тебя>, <너를 보고 싶어Жажду свиданья>, <떠나지 마, 나와 함께 있어Не уходи, побудь со мною>등이 주보프의  유명한 곡들이다. 주보프에 의해 작곡된 발체바의 집시 가요는 이제 갓 태어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도시적 삶’에 익숙하지 않았던 남성 노동자들의 ‘프로이트적인 원초적인 욕망’을 자극하면서 문화가 만들어낸 ‘소시민적인 규범’의 강제적 준수가 가져다 준 망각의 복원, 즉 ‘야만적 삶에 대한’ 동경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동경’은 바로 태곳적의 감각적이고 원초적인 본능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발체바와 함께 살았던 동시대인들은 발체바의 목소리의 아름다움, 노래의 친근감,  노래 창법의 독창성 등을 그녀의 성공의 열쇠로 보았다. 또한 발체바의 집시가요 속에는 ‘끈적끈적한 마약성 향기’가 들어있고, 빛나는 미소,  풍부하고 표현력 있는 목소리의 음색,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의 저편에 있는 인생의 말초적인 기쁨, 슬픔과 인생의 고통스러운 문제에 대한 자연스러운 망각과 찬미들도 응축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나에게서 너를 지우지 않겠어요!>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 그 가련하면서 애처로운 목소리를 듣는 관객들은 무아지경이 되어 퇴폐적인 반문화적인 원시성에 도취되었다.  실제로 발체바의 공연은 거대 자산가 뿐 만아니라 러시아 귀족상류계층의 남성들을 ‘팜므파탈’적인 매력으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정도였다. 

집시가요를 주로 공연한 고급 레스토랑의 밤무대에 자주 드나든 상류층 및 저명한 인사 중에는, 레프 톨스토이, 라스푸틴, 알렉산드르 블록 등이 있었다. ‘점잖음’의 외피 속에 자신들의 ‘원초적인 본능’을 숨기고 살았던 그들은 격동기 시절 노골적이고 저속한 가사와 격정적인 리듬의 멜로디를 혼합인 ‘집시가요’가 제공하는 그 넘쳐흐르는 ‘방종, 자유, 해방’에서 소심하게 작은 일탈을 즐겼다. 흥미로운 것은 평생 집시 가요의 진정한 애호가이면서 집시가요에 조예가 깊었던 러시아 상징주의의 거목 ‘알렉산드르 블록’은  야생적 원시성이 폭발하는 발체바 특유의 창조적인 미학(?)을 접한 이후, 발체바의 노래를 극단적으로 싫어했다. 그는 유대인 출신의 라리소바(Раисова)의 집시 로망스를 훨씬 좋아했다.

                                                                       알렉산드르 블록

발체바의 후예와 백혈병

1913년 초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발체바가 혈액암(백혈병)을 앓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발체바의 건강에 대한 소식은 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의 초유의 관심사였고, 그녀의 건강에 대한 소식은 신문 판매대에 게시될 정도였다. 그녀의 남편인 근위기병대의 장교인 바실리 비스쿱스키(Василий Бискупский)는 러-일 전쟁에서 중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수혈을 하는 등 헌신적으로 그녀의 소생을 위해 노력했지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발체바는 1913년 2월5일 41세의 나이로 화려한 인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무덤은 페테르부르크 넵스크 수도원의 예술인의 묘지(Никольское кладбище Александро-Невской лавры)에 위치해 있다.


                                                             
아나스타시야 발체바의 묘


발체바의 공연 스타일과 양식은 러시아 모더니즘의 또 다른 기수인 알렉산드로 베르틴스키(Александр Вертинский)에게 전수되어, 발체바 특유의 스타일과 그 신비스러운 독창성은 연속성을 가지게 되었다. 알렉산드로 베르틴스키는 발체바의 죽음 이후 본격적으로 공연 무대를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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