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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안드레이 플라토노프가 말하는 ‘행복 보존의 법칙’
분류문학
국가 러시아
날짜2019-04-15
조회수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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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소설은 말년에 집필한 몇몇 단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겁고 음울한 분위기를 장착하고 있다. 게다가 그의 텍스트는 제대로 읽히지도 않는, 설령 읽힌다 한들 그 뜻이 과연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되지 않는 글로 ‘악명’이 높다.

비록 플라토노프의 작품으로 학위논문까지 썼지만, 아직까지도 여전히 그의 작품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명치 어딘가가 답답해지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나름 연륜이 쌓인 것인지 아니면 플라토노프라는 작가의 화법에 조금이나마 익숙해진 덕분인지, 그의 텍스트를 처음 접했던 당시 이해되지 않는 문구들의 향연 속에서 숨이 턱하고 막히던 기분은 어느새 플라토노프의 주인공들에 대한 연민으로 바뀌어 가슴 한 곳에 먹먹한 여운을 남기는 것으로 대체되어 버렸다.

           
           A. 플라노토프 作 <코틀로반>                           <행복한 모스크바>  아카데미 판본


플라토노프의 다양한 작품 중에서도 특히 <행복한 모스크바>는 그의 작품 중에서도 유달리 결이 다른 작품으로 손꼽히곤 한다. 유리 나기빈은 플라토노프의 <행복한 모스크바>의 주인공들을 <코틀로반> 보다 더 끔찍하고 무서운 플라토노프의 창조물이라고 일컬은 바 있다. 나기빈의 시선에는 묘지에 드리워진 아련하고 창백한 빛과 같은 그 무언가가 <행복한 모스크바>라는 작품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듯이 비춰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시선 속에서 플라토노프의 작품의 모든 존재는 무덤 속에서 평온한 안식에 든 것이 아니라, 이미 찢어질 듯이 아프게 찌르며 파고드는 조롱과 그러한 조롱으로 인한 고통으로 인해 이미 무너져버린 상태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행복한 모스크바>를 읽어내려가면서, 우리는 제일먼저 나기빈이 느꼈던 그것과 동일하게 플라토노프의 주인공에게서 이제는 영원히 무덤에 누워버린 듯,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버려지고 방치된 듯한 무기력함을 발견하곤 한다. <행복한 모스크바>에서 모든 것이 다 무너져 내린 듯한 상황들, 주인공들이 점점 혁명의 빛과 모스크바라는 화려한 무대에서 내려오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결국에는 지하 단칸방에서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동거인의 바가지를 긁는 ‘모스크바 체스노바’의 모습에서, 복권이나 긁어서 한 몫 크게 잡으면 모든 것이 다 좋아질 것이라는 허황한 믿음을 수줍게 고백하는 ‘코먀긴’의 모습 속에서, 촉망받던 과학자에서 어느 날 갑자기 직업과 이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평범한 아무개 씨가 되어버린 사르토리우스의 모습 속에서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해버린 과거의 영광과 쇠락의 빛을 발견하게 된다.

                                  A. 플라토노프 作 <체벤구르>에 삽입된 삽화들 (S. 필리포바 作)

플라토노프의 작품에서 혁명은 늘 중요한 소재이다. <코틀로반>, <체벤구르>, <내밀한 인간> 등의 작품 한가운데는 늘 혁명과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 <행복한 모스크바>의 주된 배경은 이미 혁명 이후의 모스크바이지만, 실제로 여주인공 ‘모스크바 체스노바’를 평생 따라다니는 기억은 다름 아닌 바로 ‘혁명’의 기억이다. 하지만 뭔가 ‘거대한 음모’와 비밀이 간직되어 있을것만 같았던 ‘모스크바 체스노바’가 간직한 혁명의 기억은 작품의 후반부에 이르러 외부로부터 혁명의 세대에게 무의식적으로 강요되고 주입된 기억의 일부였음이 밝혀지게 된다. 어둠에 휩싸인 채,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거리를 뛰어가던 한 남자는 어린 모스크바 체스노바의 기억 속에서 총을 맞고 쓰러졌다. 마치 못 볼 것을 본 아이처럼, 마치 자기가 지켜보는 바람에 그 사람이 죽은 것은 아닌지 하는 죄책감에 평생을 시달리면서 기억 속 남자를 애도했건만, 그리고 혁명의 용사에게 ‘빚’을 졌다는 의무감에 원하지 않는 ‘혁명의 딸’로 살아갔건만, 정작 그 남자는 총에 맞아 죽지도 않았고, 혁명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 용사도 아니었던 것이다.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 ‘횃불을 들고 뛰어갔던’ 어느 남자는 다름 아닌 코먀긴이었고, 그마저도 ‘횃불을 든 볼셰비키 영웅’이 아니라 가난한 빈민가를 어슬렁대던 쓸모없는 자위대 감독관 역할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혁명과 더불어 그 혁명을 장식했던 역사적 주인공들의 모습 역시 모두 과거의 영광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탈관’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혁명은 뭔가 거창하고 요란했지만, ‘용두사미’의 모양새로 끝나버린 조롱과 야유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렇듯 <행복한 모스크바>에서 혁명이라는 소재는 과거의 플라토노프의 작품과 다른 형태로 그려진다. 기존의 플라토노프 작품에서 혁명은 ‘도달해야 할 유토피아, 하지만 도달할 수 없기에 좌절할 수밖에 없는 그 무엇’을 이데올로기의 굴레와 더불어 다소 노골적으로 상징화했다. <행복한 모스크바>에서 혁명은 기존의 ‘소비에트 유토피아’라는 기본적인 모토 외에도, ‘삶에서 내가 꼭 이루어야 할 그 무엇, 혹은 사명, 목적’을 지시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무엇’을 이루고 도달하기 위해 나는 스스로의 삶에서 무언가를 ‘결핍’으로 이끌어야만 한다.

모스크바 체스노바도, 과학자 사르토리우스도, 의사 삼비킨도 혁명을 성취하기 위해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영원히 잠재우려 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내 안의 나’는 혁명의 이상과 괴리되는 존재일 수도 있다. ‘내 안의 나’는 혁명이 요구하는 그런 모습을 갖추지 못한 존재일 수도 있다. ‘내 안의 나’는 내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혁명과 혁명의 이상보다 내 손에 잡히는 ‘사랑하는 그대’를 더 갈망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결핍’을 감수하면서까지 아름답게 지켜내려 했던 그 혁명은 과연 그만큼의 가치를 지닌 것이었을까? 질문을 약간 바꾸어보자. 플라토노프의 주인공은 혁명의 영웅으로 활동할 때 더 행복했을까, 아니면 그동안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꾹꾹 억누른 채 감내해오던 ‘결핍의 삶’을 내려놓고, 온전한 나의 모습으로, ‘은닉해 왔던 나’의 모습으로 그 결핍의 부분을 채웠을 때 더 행복했을까? 소비에트를 빛낸 혁명의 영웅과 유토피아의 건설자인 과학자와 건설자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즐기는 연회 속에서 사르토리우스와 모스크바 체스노바의 모습이었을 때 더 행복했을까, 아니면 과거의 자신의 삶은 물론 이름까지도 다 버린 채, 어쩌다 동거인으로 살게된 아내로부터 온갖 구박과 멸시를 당하는 와중에 따뜻한 말 한마디, 뜻하지 않게 발견한 아내의 수줍음에 설레는 맘을 가지게 되는 ‘그루냐힌’이라는 인물의 삶을 살아가는 편이 더 행복했을까? 적어도 사르토리우스는 후자의 삶에서, ‘그루냐힌’의 삶에서 더 행복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소소한 일상의 삶을 누리기 위해 또 다른 ‘결핍’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삶의 역설이고 아이러니이다. 소소한 일상의 행복은 공적인 삶 일부에서 ‘결핍’과 ‘균열’이 일어나는 순간 비로소 눈에 보이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어느 쪽의 행복을 추구하든 간에, 그것이 ‘공적’인 영역에서의 행복이든, 혹은 ‘사적’인 영역에서의 행복이든, 행복은 그것을 손에 움켜쥐고 싶어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부터 반대편에서 ‘결핍’이 발생하는 묘한 속성을 가진 대상이다.

플라토노프가 수력학자이자 동시에 소설가라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있는 사실이다. 작가가 아닌 평범한 수력학자로서 플라토노포의 삶은 그의 ‘문학적 삶’에도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주지하다시피, <그라도프 시>와 <에테르의 길>과 같은 작품에서 그의 기술자로서의 삶에서 얻은 경험이 반영되었고, <행복한 모스크바>에서는 ‘역학의 황금법칙’이라는 헤론의 법칙을 들어 이러한 ‘행복의 아이러니’를 설명해낸다.

‘역학의 황금 법칙’이란 역학을 사용하여 일정량의 에너지를 얻는 순간, 동시에 동일한 양의 에너지가 상실된다는 일종의 ‘에너지 보존 법칙’이다. <행복한 모스크바> 후반부에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 법칙’이 등장하는 것 역시 이러한 행복과 결핍의 상관관계, 즉 ‘행복 보존의 법칙’과 일맥상통한다. 지렛대의 받침점에 가깝게 위치할수록, 즉 행복의 도달점에 가까워질수록, 행복추구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더 전력투구하여 행복의 결승점을 통과하려고 한다. 하지만 지렛대의 받침점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앉을수록, 즉 행복의 도달점까지 거리가 멀수록, 행복추구자는 결승점에 위치한 ‘잡히지 않는’ 행복이 아니라, 큰 힘 들이지 않고 손을 살짝 뻗으면 잡히는 ‘일상의 행복’, 그야말로 ‘소확행’을 얻고 그것으로 충분히 결핍 없는 행복감에 젖어들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서 <행복한 모스크바>는 기존의 주인공들과 결이 다른 주인공들, 즉 기존에 플라토노프 작품에서 종종 마주치곤 했던 ‘도스토옙스키의 후예’들에서 40년대 이후에 등장하는 ‘톨스토이적 전통’의 주인공들로 이행하는 과정에 놓인 군상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굳이 소설의 구성적인 측면에 적용하자면, 소설에서 ‘소비에트 연방’을 대표하는 젊은 과학자와 학자의 연회가 펼쳐지는 6장까지가 ‘도스토옙스키의 후예’들이 등장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소설의 전반부에서 ‘모스크바 체스노바’를 비롯한 소설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소비에트 사회가 추구하는 과학기술적 유토피아의 이상과 그 실현에 경도된 것처럼 묘사된다. 7장은 여주인공 ‘모스크바 체스노바’와 남자 주인공 사르토리우스가 마치 작은 사랑싸움을 벌이는 듯한 내용을 전개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사랑’에 대한 환상과 실제의 모습, 즉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장이다. 뒤이은 8장에서 마지막 장으로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실제로 소설 주요 인물들이 연달아 신체적 불구를 겪거나 사회로부터 자발적 격리를 실천함으로써 유토피아 이상은 그 실현이 요원한 채로 방치되고, 대신 현실에서 작은 행복, 작은 유토피아를 실현하려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상과 현실 간의 어쩔 수 없는 불일치와 모순적인 공존을 인정하는 모습, 즉 삶을 ‘삶 그 자체’로 수용하는 모습은 다름 아닌 ‘톨스토이적 전통’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청년시절) .                                               플라토노프와 아내, 아들


인간은 필연적으로 모순적인 존재이며, 늘 이상과 현실의 간극 속에서 갈등하면서 행복을 저울질하는 아이러니한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의 일견 모순적인 측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주인공은 바로 ‘모스크바 체스노바’이다. 그녀는 머리와 규약이 아닌, 가슴과 본능에 충실한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모스크바 체스노바’라는 인물에게 나타나는 다소 엉뚱한 측면과 변덕스러움, 돌발적 성향 등은 <행복한 모스크바>라는 작품의 독해를 종종 방해하곤 한다. 하지만 이해하기 힘은 이런 변덕스러움이야말로, 머릿속으로는 수없이 “안 돼!”를 외치면서, 이미 손은 방금 “안 돼!”를 외친 방향으로 내뻗고 있는 너무나 모순적인 인간의 형상을 가장 잘 드러내는 특성이 아닐까?

또한 그녀를 비롯한 소설 속 인물들은 항상 본능과 이성,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 사이에서 갈등한다. <행복한 모스크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궁극적으로 늘 이쪽 혹은 저쪽이라는 선택의 경계 선상에서 갈등하고 이 세계와 저 세계 간의 불일치로 인해 번민한다. 그리고 그 불일치로 인한 모순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일생의 과제가 된다.

아마도 플라토노프는 기술자의 이성이 장착된 머리, 유토피아를 추구하던 이상이 장착된 두뇌와 작가의 감성이 녹아든 심장, 작은 일상의 행복을 추구하던 마음이 충돌하며 모순을 느낀 어느 순간, 자신의 창작의 전환점에 집필한 소설 <행복한 모스크바>를 통해서 인간의 삶은 바로 그런 모순을 해결하거나 타협해나가는 과정의 일환이라는 점, 이때 인간의 ‘의지’는 모순적인 삶을 해결하기 위한 방책이며, 인간에 대한 ‘연민’은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메우고 삶과 타협하게 만드는 매개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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