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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동양미를 품은 러시아 여인, 이다 루빈슈테인
분류공연예술
국가 러시아
날짜2019-03-01
조회수1,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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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В. 세로프, <이다 루빈슈테인의 초상화>, 1910.


1911년 5월, 이탈리아 로마에서 개최된 세계 박람회 러시아관에는 동시대 예술가들의 질타와 환호를 동시에 받은 특별한 그림 한 장이 전시되었다. 바로 발레 뤼스의 스타 무용수 이다 루빈슈테인(Ида Рубинштейн)을 그린 발렌틴 세로프(В. Серов)의 작품이었다. 당시 레핀(И. Репин)은 -  이 그림 속 무용수의 모습을 “메마른 신체로 생명력이 감지되지 않아 부자연스러운데다가, 소파까지 이어지는 등 라인은 서툴기 그지없으며, 괴로워 보일만큼 길게 늘어진 팔은 완전히 방향이 틀어진”, “부활한 시체”라고 묘사할 만큼 - 세로프의 그림을 퇴폐예술가 마티스(Henri Matisse)의 작품에 대한 모방작으로 평가 절하했다. 사실주의자였던 레핀이나 수리코프(В. Суриков)와 같은 화가들이 세로프의 루빈슈테인 초상화에 경악과 분노의 시선을 보냈다면, 베누아(А. Бенуа)와 오스트로우모바-레베데바(А. Остроумова-Лебедева)와 같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세로프가 새로운 화풍의 작품으로 아름다운 신체를 그려냈다며 그에게 극찬의 박수를 보냈다. 이처럼 두 진영으로 양분된 당대 예술계의 상황에서 그 중간 지대에 머물었던 그라바리(И. Грабарь)는 이 작품에 대한 독자적 평가를 망설이기도 했다. 다만 세로프가 이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를 설명해 주었을 뿐이었다.

그라바리에 의하면, 세로프는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상연된 <세헤라자데(Шехеразада)>를 관람할 당시 발레리나 루빈슈테인을 처음 보게 되었다. 그는 무대 위 “그녀의 모습에서 그때까지 그 누구에게서도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진정한 동양의 색채를 발견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그리겠다고 결심했을 정도로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세로프는 루빈슈테인이 보여준 것이 진부한 오페라나 발레의 허구 세계에서 등장하는, 달콤한 구식의 동양세계 아니며, 이 믿을 수 없는 여성 안에서 이집트 자체가, 아시리아 자체가 어떤 기적에 의해 부활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그라바리의 말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20세기 초반 발레 뤼스의 활동으로 유럽 예술계에 보다 확산된 이국주의나 동양취미가 루빈슈테인의 고혹적인 무대를 통해 보다 구체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방의 아름다움을 품은 러시아 여인 루빈슈테인은 세로프 뿐만 아니라 키스 반 동겐(Kees Van Dongen), 안토니오 드 라 간다라(Antonio de La Gandara), 앙드레 스공자크(Andre Dunoyer de Segonzac), 로메인 브룩스(Romaine Brooks) 등 세계 각국의 저명 화가들에 의해 형상화 되었고, 세계 미술사에서 그녀는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이 되어 준 러시아 여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안토니오 간다라, 유화, 1913.                  로메인 브룩스, 유화, 1917.


현재 루빈슈테인의 전기적 정보는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루빈슈테인 스스로 그녀의 어린 시절 삶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여러 문헌에는 그녀의 탄생지가 널리 알려진 바 있는 하리코프가 아닌 페테르부르크로 기록되어 있다거나, 태어난 해 역시 1880년, 1883년 혹은 1885년으로 제각기 다르게 서술되어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녀의 정보 중 어디에서나 공통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사실은 그녀가 매우 부유한 환경에서 나고 자랐으며, 성인이 되기 전까지 부모가 아닌 친척들의 그늘과 보호 아래서 성장했다는 것이다. 보편적으로 그녀에 대해 알려진 정보에 의하면 루빈슈테인은 당시 러시아에서 내로라하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로만 루빈슈테인과 아들들(Роман Рубинштейн и сыновья)>이라는 이름의 은행을 건립한 인물이며, 그 가족들은 <노바야 바바리야(Новая Бавария)>라는 양조공장과 설탕공장을 비롯해 꽤 많은 상점들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부유했던 그들은 자선 활동과 문화생활에 많은 돈과 시간을 쏟았는데, 이러한 가정의 분위기는 훗날 루빈슈테인이 예술가로서 그리고 자선활동가로서 진지한 삶을 살아가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유복한 환경에서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소녀로 성장했을 무렵, 루빈슈테인은 부모를 잃고 페테르부르크에 거주하고 있던 숙모 마담 고로비츠(мадам Горовиц)에게 보내졌다. 다행히 사망한 아버지로부터 큰 재산을 물려받았던 터라 그녀는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랄 수 있었다.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해 역사학자 포고딘(А. Погодин)은 페테르부르크 각 분야 최고의 선생들이 그녀를 가르친 덕분에, 그녀는 어린나이부터 이미 4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고대 그리스의 예술세계를 탐독하면서 예술사를 섭렵했으며, 음악 공부에도 심취해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언급했다. 실제로 그녀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에 능통했고, 음악과 역사 공부를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이러니한 점은, 숙모가 그녀를 위해 황실극장 무용수를 선생으로 고용하기도 했지만 춤에서는 특별한 재능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그녀는 춤과 연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날이 갈수록 공연예술에 대한 흥미와 관심은 진지해져만 갔다. 급기야 그녀는 배우나 무용수의 삶을 꿈꾸게 되었고, 극예술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 유학을 결심했다. 루빈슈테인의 후견인이던 친척들은 파리 유학중인 그녀를 정신병원에 가둘 만큼 그녀의 결정에 극심한 반대 입장을 보였다. 20세기 초반 러시아 사회에서 여성무용수라는 직업은 훌륭한 교육을 받은 숙녀가 마땅히 지녀야 할 정숙성과는 거리가 먼 직업으로 분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루빈슈테인을 교육했던 교사들은 그녀의 키가 너무 크고 체중이 적어 힘과 테크닉을 요구하는 춤이 그녀에게 쉽지 않을 것이며, 그녀가 직업무용수로서 활동하는 일이 불가능 할 것이라 판단했다. 그럴수록 춤과 연기에 대한 그녀의 열망은 커져갔고, 연습에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친척들의 과도한 관심과 개입에 지친 루빈슈테인은 그들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바로 사촌과의 결혼을 감행, 신혼여행 직후 이혼을 결심했던 것이다. 성년이 되어 그렇게 자유를 얻은 루빈슈테인은 친척들의 보호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관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예술가로서의 삶에 본격적으로 진입했다.

                                       이다 루빈슈테인, 연습실에서.


예비 배우가 된 루빈슈테인은 극단에 들어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고, 대신 유산으로 물려받은 재산 중 일부를 투자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Антигона)>를 직접 제작해 주인공을 맡는 길을 선택했다. 이 작품은 1904년 4월에 초연되었으나, 이에 대한 평가 자체가 전무할 만큼 참패의 성적을 거두었다. 루빈슈테인은 절망하지 않고 페테르부르크의 주요 극장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다녔다. 결국 그녀는 베라 코미사르제브스카야 극장에 들어갔고,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살로메(Саломея)>의 초연에서 주역으로 캐스팅되었다. 이 공연 출연확정 소식은 초보 배우였던 루빈슈테인에게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브세볼로드 메이에르홀드(В. Мейерхольд)가 연출을, 레온 박스트(Л. Бакст)가 세트 제작을,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А. Глазунов)가 작곡을 맡아 참여했던 만큼, 당대 러시아 극장예술 분야의 스타들이 총출동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루빈슈테인을 위한 <일곱 베일의 춤(Танца семи покрывал)> 장면은 당시 발레계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던 무용수이자 발레마스터 미하일 포킨(М. Фокин)이 안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연은 불발되고 말았고, 루빈슈테인은 <살로메> 중 그녀를 위해 안무된 개별적인 춤 공연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일곱 베일의 춤> 초연은 1908년 페테르부르크 콘서바토리에서 개최되었고, 공연 직후 문화예술계는 들끓었다. 루빈슈테인은 공연중 그녀가 걸치고 있던 천을 벗어 던졌고, 무대 위의 그녀는 관객들에게 벌거벗은 상태로 보일만큼 파격적이었던 것이다. 공연은 큰 유명세를 탔다는 점에서 대성공이었지만 이에 대한 평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언론과 비평가들은 루빈슈테인이 보여준 무대를 예술가의 ‘매혹적인 열정’이라며 이전에 결코 볼 수 없던 춤과 무대였다고 평가했으나, 일각의 예술가들은 ‘학습이 덜 된’, ‘재능 없는 벗은 알몸’이었다고 언급한 스타니슬라프스키(А. Станиславский)의 악평에 동의하기도 했다.

2년의 시간이 흐른 후, 루빈슈테인은 디아길레프(С. Дягилев)의 첫 러시아 시즌에 참여했다. 파리에서 그녀는 포킨이 연출한 <클레오파트라(Клеопатра)>와 <세헤라자데>에서 주역을 맡았다. 사실 그녀는 러시아 발레 역사상 최초의 비전문댄서였는데, 러시아 발레학교에서 완벽한 테크닉을 습득하고 발레단에 합류한 무용수들 사이에서 그녀가 주역으로 발탁되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캐스팅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공연은 발레 뤼스의 성공을 결정지은 중심 사건이었다. 그녀가 발레 뤼스의 작품에 잘 어울리는 동양적인 아름다움, 혹은 베누아의 말대로 ‘아시아적 화려함’을 지녔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나 <세헤라자데> 주인공들은 본능적 주체로서 감각적인 여성의 성격을 가지며, 이러한 감각적 쾌락과 우발적이고 능동적인 사랑을 스스로에게 허용하는 여성으로서 주인공들의 모습은 20세기 모던 발레에 새로이 등장한 여성상이라고 볼 수 있다. 루빈슈테인은 정신적 여성상이라기보다는 여성의 육체성이 강조된 두 작품 속 여주인공 캐릭터에 부합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파리 시민들은 그녀의 카리스마 넘치는 고혹미, 표현력 풍부한 신체, 폭발적인 연기력에 감탄했고, 파리 전체는 루빈슈테인의 춤과 외모에 매료되었다. 얼마 후, 그녀의 사진은 유럽 예술잡지 및 신문 전면에 등장했고, 초콜릿 상자 및 광고포스터 등을 통해 대중의 일상에 자리 잡았으며, 그녀의 사진과 이름을 활용한 기념품들이 제작되어 불티나게 판매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공연은 당시 패션 트렌드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파리 여성들은 루빈슈테인이 <클레오파트라>에서 착용했던 것과 유사한 푸른색 가발을 일상에서 쓰기 시작했고, 그들의 드레스에는 이집트 전통 문양이 장식되었다. 또한 그녀가 <세헤라자데>에서 착용했던 터번, 하렘팬츠와 같은 동양풍의 의상 및 소품들은 디자이너 폴 푸아레(Paul Poiret)나 마리아노 포르투니(Mariano Fortuny)의 창작 소재가 되어 널리 유행하기도 했다. 심지어 실내인테리어에도 무대 장치로 사용된 소품들과 유사한 형태의 장식물들이 적용되기도 했다. 훗날 박스트는 당시 유럽을 휩쓸었던 ‘루빈슈테인 돌풍’에 대해 “그녀가 단지 ‘과한 노출 의상을 입은 아름다운 여배우’가 아닌 진정한 매력과 죽음”을 선보일 줄 아는 여신이었기 때문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세헤라자데>의 루빈슈테인                     <클레오파트라>의 루빈슈테인


1928년,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딴 <이다 루빈슈테인 발레> 단체를 조직했고, 1929년 디아길레프의 사망 이후로 루빈슈테인 발레단은 유럽에서 선두를 차지했다. 그곳에는 화가 알렉산드르 베누아, 무용수 레오니드 먀신(Л. Мясин), 발레마스터 브로니슬라바 니진스카야(Б. Нижинская)가 속해있었다. 그들의 활동은 스트라빈스키(И. Стравинский)가 제작한 발레 <요정의 키스(Поцелуй феи)> 공연을 시작으로 스페인 민속 모티프를 활용한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의 <볼레로(Болеро)>,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페르세포네(Персефона)> 등 다수의 작품을 선보이면서 프랑스 활동을 성공적으로 이어갔다. 루빈슈테인은 193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무용수로서의 삶을 마무리했다. 1938년 바젤과 1939년 오를레앙에서 선보여진 성악극 <화형대의 잔다르크(Жанна д’Арк на костре)>의 무대를 마지막으로 그녀의 공연은 더 이상 개최되지 않았다.

그 후 독일 군대가 파리를 점령하면서 그녀는 영국 런던으로 삶의 근거지를 옮겼다. 유태인이었던 그녀는 프랑스에 남아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친구도, 춤도, 무대도 잃은 루빈슈테인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그녀는 유년시절에 습득한 외국어 능통자로서 UN에서 번역자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으나, 주로 어린 시절 보았던 부모의 뜻을 따라 자선활동에 매진하며 살아갔다. 그녀는 자신의 재산과 열정을 남김없이 쏟아 군병원을 설립했고, 진료소에서 상처 입은 병사들을 간호하며 타지 생활을 극복했다. 전쟁이 끝난 후, 루빈슈테인은 파리로 돌아왔지만 그녀의 고독한 삶은 지속되었다. 그녀가 살던 집은 이미 파괴되어 있었고, 그리워했던 친구들도 그곳에 없었다. 그녀는 사람들이나 언론과의 접촉을 거부하며 고독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1960년 9월 20일, 이다 루빈슈테인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녀의 나이 75세, 혹은 78세, 혹은 80세의 나이였다. 루빈슈테인의 유언에 따라 장례식은 간소하게 치러졌고, 그녀의 기념비에는 이름, 사망날짜와 같은 기본정보조차 남겨지지 않았다. 단지 I. R.이라는 알파벳 두 글자가 새겨졌을 뿐이다.

                                                              루빈슈테인의 영국 생활


20세기 초, 루빈슈테인의 대표작들은 동양 세계의 야만적 문화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던 까닭에 언제나 선정성과 폭력성의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그녀가 뿜어냈던 동양적 아름다움과 퇴폐적 원시성은 예술 세계와 발레 뤼스 예술가들에게 있어 온전히 ‘신선한’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져 끊임없이 예술적 창작의 영감이 되었고, 이는 그 당시까지 유럽의 그늘에 가리어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던 러시아의 창조적 예술세계를 유럽인들에게 여과 없이 보여줄 수 있는 소재로 활용되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이다 루빈슈테인은 언제나 중심적 위치에 자리했던 인물이라고 볼 수 있으며, 바로 이 점은 그녀가 발레학교에서 전문교육을 받은 무용수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러시아 발레를 대표하는 발레리나 중 한 명으로 언제나 호명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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