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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러시아어 기록으로 본 조명희와 고려인 문학
분류문학
국가 러시아
날짜2019-03-01
조회수1,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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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학계에 해외 거주 동포들의 문학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이들 동포문학은 다른 용어로 ‘망명문학’, ‘재외문학’ ‘이주문학’으로 지칭되고 있다. 일본의 침략과 지배를 겪으면서 ‘망명문학’을 형성한 우리나라는 인접 지역인 동양 문화권인 중국, 일본은 물론이요, 서양문화권인 미국, 독일,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지역(특히 카자흐스탄)에 이주하여 그 지역의 문화권 내에서 활동하면서 적지 않은 한인 문학(고려인문학)을 형성하고 있다.  즉 국제화 시대, 다문화시대에 우리 동포들은 세계 도처에서 세계문학 가운데 어엿한 한인 이주 문학을 형성하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재외 한인 망명 문학 중에서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한인 망명문학’은 특별한 그들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디아스포라에 디아스포라(스탈린 강제이주)를 겪은 동포(고려인)의 문학은 삶의 비운 속에서도 포석 조명희를 시초로, 1920-30년대의 한글문학, 그리고  러시아어로 창작하는 현재의 문학 활동까지 그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어 이 지역의 한인 망명문학(고려인문학)은 그 양에 있어서나 주제와 내용의 새로움에 있어서나 우리 문학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한 부분이다.

                                                               <포석 조명희 문학관>

<선봉과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망명문학>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한인 망명문학의 원년이라 할 수 있는 1925년은 망명문학의 장을 여는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는 「선봉」(Сенбон, 1923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된 한글 신문)의 ‘문예 페이지’가 새롭게 만들어진 해이다. 한인 작가들은 이 신문의 ‘문예 페이지’에 자신의 작품을 게재하였고 그들을 중심으로 망명문학의 태동 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선봉>을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한 망명 작가들로는 조명희, 강태수, 김기철, 연성룡, 김준 등을 꼽을 수 있다.특히 포석 조명희는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한인 망명문학의 창시자이자 ‘한인 문학의 아버지’로서 남북한 문단에 정통한 중개인이기도 했으며, 제 1시기 망명문학의 대들보 역할을 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러시아 문헌의 기록을 두 가지만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산문작가, 시인, 극작가, 출판인으로서 조명희는 소련의 고려인 문학의 가장 뛰어난(걸출한) 작품과 관련되어 있다.  역사는 조명희에게 고려인 문학의 창시자가 되는 과업을 맡겼다.(История и культура корейцев Казахстана. Алматы: Гылым, 1995. c. 12.)

 고려인 문학을 한국(고려인의 고국)문학과 분리해서 고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고려인 문학은  한국 문학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있기 때문이다. 만일 20세기 초 유명한 한국의 산문작가 겸 시인인 조명희(1920년대 한국에서  러시아 극동 지방으로 망명한)를 고려인 문학의 창시자로 생각하면,  이러한 본질적인 관련성은 더욱더 명백해 진다. (О литературе корейцев Казахстана. 2003. c. 3)

이러한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망명문학에 대한 포석 조명희 공적을 인정하여 2006년 8월8일 이르쿠츠크 극동기술대학에서 조명희 문학비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조명희의 막내아들 블라미미르와 다슈켄트에 살고 있는 포석의 외손자인 안드레이 등이 참석했다.

                                                  < 조명희 문학비 제막식>

<포석 조명희의 활동 및 업적>
포석 조명희는 일제하에서 신음하는 한민족의 실상을 고발한 항일저항의 산문시 「짓밟힌 고려」를 시작으로 여러 한글 작품을 발표하면서  연해주 및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여러 지역에 사는 청년들에게 문학을 알려주고 창작 법을 가르쳤다. 또한 조명희는 손수 「선봉」지에 정기적인 문예페이지를 만들어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한인 망명문단의 토대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명희의 헌신과 노력은 그의 제자가 된 강태수, 김기철, 연성룡, 김준 등에게 그의 사상과 이념뿐만 아니라  작품의 형식, 기법, 언어 같은 문학적 유산을 물려주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와 관련된 기록을 한번 살펴보자.

 러시아에서 창작된 조명희의 작품들은 명백히 폭넓은 명성을 획득하였지만, 그의 작품들은 탄압으로 인하여 보존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명희의 작품들이 소련 내의 고려인 문학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였다는 것은 두말 할 것이 없다.(О литературе корейцев Казахстана. 2003. c. 12.)

망명지 러시아(구소련)에서 조명희는 1934년에 망명 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탄생시킨 ‘소련 작가동맹’의 일원이 되었으며, 일본의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찬동하였다. 조명희의 ‘소련작가동맹’의 가입에는 알렉산드르 파다예프 (Александра Фадеев)의 도움이 있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을 한번 살펴보자.

 1924년 제 1차 전 소련 작가동맹회의 후, 알렉산드르 파다예프의 제안에 따라, 그는 소련 작가동맹의 회원으로 받아들여졌다.(Понятие Чо мён хи. Лтиературная энциклопедия. М. 1970.)

1924년 제 1차 전 소련 작가동맹회의 후, 알렉산드르 파다예프의 제안에 따라, 그는 소련 작가동맹의 회원으로 받아들여졌다.(Открыт памятник Чо Мен Хи. :http://pavlov.nm.ru/news/p1388.html)


                                         포석 조명희

<포석 조명희의 죽음>

조명희의 러시아 망명 생활 중 가장 논란이 많은 부분이 그의 죽음과 관련된 것들이다. 조명희의 죽음에 관한 사건은 하나의 비극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조명희는 1928년 7월 소련으로 망명한지 10여년 만에 ‘일본을 위해 간첩행위’를 한 이유로 체포되어 극비리에 처형당한다. 이와 같은 조명희의 사망과정은 그를 따르던 모든 이들을 충격과 슬픔에 빠지게 하였다.

조명희 체포 후 거의 20년 동안 그에 대한 소식은 전혀 없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만들어낸 전체적인 공포분위기 속에서 그의 이름은    제한적으로 조용히 가족사이, 창작 지식인들 사이에서만 언급되어질 뿐이었다.  물론, 조명희의 작품의 발행과 대중화에 대한 어떠한 말도 없었고, 두 권의 소설은 영영 잃어버리기 까지 했다. 조명희가 더 이상 창작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그 당시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창작과 능력의 전성기에 있었던 조명희를 총살하였다.  그의 나의 44살이었다.(К 115-летию со дня рождения Чо Мен Хи.//http://ru.koresaram.doira.uz /Blogs /soob/BlogEntryInfo.aspx?Id=8118c260-881f-4ac0-8209-f698a9719499)

조명희의 사망원인이 정확하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레닌기치』 1990년 4월4일자 4면에 실린 ‘조명희 선생에 대한 몇 가지 새로운 자료’에 의해서다. 그런데 조명희의 딸, 조 왈렌지나 명희에브나(조선아)가 가지고 있는 서류에 따르면, 조명희는 ‘일본을 위한 간첩행위를 감행하는 자들을 협력한 죄로 헌법 제 58조에 따라 취조와 재판도 없이 최 고형-총살선고를 받아 사망하였으며, 사망 시기는 1938년 4월 15일로 되어 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을 한번 살펴보자.

조명희가 완전히 그에 대한 심문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1938년 4월 15일 <트로이카>위원회에서 총살형이 결정되었고, 그로부터 1달도 안되어서 이 결정은 실행에 옮겨졌다.(http://ru.koresaram.doira.uz/)

그런데 또 다른 자료들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사망일시가 다르게 되어있다. 즉 1956년 조명희가 흐르시초프의 해빙정책으로 복권되면서, 1989년에 사형당한 구체적인 날짜와 장소를 알 수 있게 되었는데, 사망연도가 일부 정보에서는 수정되었지만 1942년 2월로 되어 있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대부분의 조명희를 연구하는 러시아 측 연구자들은 그의 사망일시를 기록하는데 있어 보통 연도만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자.

작가는  1937년 체포 되었고,  1938년 어느 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비극적으로 그의 삶은 끊어졌다. (О литературе корейцев Казахстана. 2003. c. 12.)

<포석 조명희와 고리키, 그리고 러시아 문화>

초기 작가시절부터 조명희의 작품은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경향에 기울여져 있었고 그가 바라본 ‘현실의 어려움’을 사회주의를 통하여 구현 할 수 있다고 작품 속 에서 제시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1920년대 한국으로 들어온 러시아의 문학의 영향아래 형성되어진 것이다. 이시기 한국에서는 카프(КАПП) 및 신경향적인 문학이 생겨났다. 특히 고리키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조명희에게 특별한 것이었고 이러한 특별함은 조명희를 거쳐 러시아 한인 망명문학과 고리끼의 인연으로 이어진다:

신생 고려인 문학에 막심 고리끼는 많은 도움들 주었다. 1928년 9월 6일 자 ‘선봉 ’신문에 이 고려인 신문의 통신원들에게 보내는 고리끼의 편지가 게재되었다. 편지말미에 고리끼는 ‘당신들 주위에 새로운 것이 자라나듯이, 당신들이 작품을 창작하기를 바랍니다. 당신을 마음 설레게 하는 모든 것을 쓰세요’ 라고 적었다. 그때부터 ‘선봉’ 신문은 특별히 정기적으로 ‘문학면’을 발행하였다.

                                                                          막심 고리키


이러한 조명희의 ‘사회주의적’ 사상에 대한 경도는 정신적 이념의 종주국인 ‘러시아’로의 망명으로 인해서 더욱더 강화되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있다.  망명을 계기로 이론만으로 존재하던 조명희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그의 시에서 녹아있던 낭만주의와 결합되어 ‘낭만성과 혁명성’을 내포하게 되었다. 러시아로 망명 한 직후 발표된 소설 『아들의 마음』에서 기존의 소설보다 더욱더 강렬한 사회주의 사상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데서 바로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가난한 어머니의 희망을 외면하고 노동운동으로 나 갈 수밖에 없는 노동자 아들의 모습을 그리고 는 이 소설은 마치 고리끼의 『어머니』의 처음 부분이 연상될 정도로 러시아 문화(문학)의  강한 영향이 느껴진다.  

러시아 망명 생활을 통하여 조명희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대변되는 망명지 러시아의 문화, 이러한 문화 속에 스며있는 사회주의를 실존적/사상적 언어로 표현,  다른 문화의 요소들을 자신의 단일한 테두리 안에서 녹여내어 러시아와 한국의 문화를 공유하려는 작가로 새롭게 출발하는 기회를 얻고 있는 것이다. 

조명희 작품에 스며들어 있는 이러한 러시아문화적인 요소는 그가 가르친 후대에게 영향을 미쳐 1세대 한인 망명문학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 이와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러시아 작가들의 전통과 한국문학의 예술적 탐구가 결합된 조명희의 예술적인 경험은 민족 미학의 사상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О литературе корейцев Казахстана. 2003. c. 12.)

결론적으로 조명희는 망명이후 자신의 작품에서 일상적인 이야기에서부터 깊이 있고 철학적인 사회주의 사상의 차원까지 러시아의 문화와 문학의 영향 - 특히 고리끼의 영향- 을 한국 문학적 전통과 다양하게 혼합/반영하고 있으며, 이후 이러한 것이 한인 망명 문학 발전에 주된 동인으로 작용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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