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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스타니슬랍스키냐, 메이예르홀트냐 ①
분류공연예술
국가 러시아
날짜2019-02-14
조회수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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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간의 기나긴 애증
스타니슬랍스키(1863~1938)는 현대연출술의 비조로 꼽힌다. 이전에도 연출가는 존재했지만, 단지 행정과 공연의 기술적 측면을 담당한 반면, 스타니슬랍스키는 희곡의 해석과 배우훈련, 무대연습, 미학적 종합화 등 공연의 모든 측면을 책임진 최초의 연출가였다. 그가 연기훈련과 공연연습을 위한 지침용으로 만든 이른바 ‘시스템’은 오늘날 전 세계 연극학교에서 교본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거기에 등장하는 용어와 개념 들은 배우훈련과 공연준비를 위한 표준으로 통용되고 있다. 끼나 타고난 재능으로 치부되던 연기술을 체계적, 유기적 훈련을 통해 ‘학습’할 수 있다고 믿었던 스타니슬랍스키는 시스템을 통해 과학적 연기학의 토대를 구축했다.

스타니슬랍스키가 진실한 감정과 논리적 행위를 기반으로 하여 리얼리즘적 연기연출술을 확립했다면, 그의 제자였던 메이예르홀트(1874~1940)는 그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메이예르홀트는 볼거리 위주의 연극성을 강조하면서 양식화된 연기와 그로테스크의 미학을 추구했다. 파격적 실험과 다양한 장르혼용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연기연출술은 모더니즘 미학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이처럼 극단적인 대결양상을 보이는 두 사람의 미학이념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인간적 관계는 그리 일면적이지 않았다. 스타니슬랍스키는 깊이가 없는 모더니즘 연극과 극단적인 좌파 예술을 비판하면서도 메이예르홀트에 대한 애정을 거두지 않았고, 메이예르홀트 또한 모스크바예술극장의 보수성과 구태의연함을 맹공격하면서도 스타니슬랍스키에 대한 존경심만은 잃지 않았다.

                                            스타니슬랍스키

‘스튜디오-극장’의 실패한 성공
두 사람이 처음으로 결별한 것은 1902년의 일이다. 1898년 스타니슬랍스키와 네미로비치-단첸코가 므하트를 창립했을 때, 모스크바대학을 자퇴하고 배우의 길에 나선 24살의 메이예르홀트는 극장 창단멤버가 된다. <갈매기>의 트레플레프를 비롯해 비중 있는 다수 배역을 맡던 메이예르홀트는 1902년 <황제 표도르 이바노비치> 배역 문제로 스타니슬랍스키와 마찰을 일으켰고, 이어서 단원 주주의 자격조차 부여되지 않자 극단을 떠나게 된다.

므하트를 떠나 자신의 극단을 만든 메이예르홀트는 스승의 리얼리즘 연출술을 계승하기보다는 북유럽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상징주의 연극을 비롯해 새롭고 혁신적인 공연제작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훈련이 덜 된 배우와 열악한 지방극장 사정으로 인해 대단한 흥행을 일으키진 못했지만, 그의 실험과 연구는 점점 구체화되었다. 그렇게 3년간 고생스러운 지방극단생활을 하던 차에 스타니슬랍스키의 호출을 받는다. 당시 스타니슬랍스키는 체호프의 죽음(1904) 이후 연극의 진로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깊은 고민에 빠져있던 시기였다. 문득 메이예르홀트가 떠올랐고, 그가 시도하는 다양한 실험 속에서 미래연극에 대한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몰려왔다. 1905년 스타니슬랍스키는 메이예르홀트에게 ‘스튜디오-극장’을 맡기고 전폭적 지원을 약속한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메이예르홀트의 파격적 실험은 스타니슬랍스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결국 ‘스튜디오-극장’의 작품들은 한 편도 무대에 오르지 못하고 사장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시기 메이예르홀트가 시도한 다양한 연극적 실험은 그의 연출미학을 완성하는 데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메이예르홀트

혁명 전선에서의 격돌
이후 메이예르홀트가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코미사르젭스카야극장과 황실극장에 일하게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소강상태를 유지한다. 하지만 10월혁명은 다시 두 사람을 역사의 격전장으로 불러내고 만다. 메이예르홀트는 인민계몽위원회 연극분과장을 거쳐 메이예르홀트국립극장 극장장이 되어 좌파진영의 선봉에 섰고, 스타니슬랍스키는 자의 반 타의 반 우파진영의 수장 역할을 했다. 좌파 선봉장으로서 우파 부르주아 극장들을 향한 메이예르홀트의 날 선 비판은 스타니슬랍스키를 빗겨 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메이예르홀트는 비판의 칼날 끝에 스타니슬랍스키 대신 므하트를 세웠고, 척결과 청산을 외치기보다는 교정과 개선을 요구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스승을 보호하고자 애쓴 것이다. 1921년 집필한 <스타니슬랍스키의 고독>은 우파 극장에 대한 비판이 어떻게 스타니슬랍스키를 우회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다.
스타니슬랍스키 또한 마찬가지였다. 수준 낮고 천편일률적인 혁명극들이 난무하는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그는 메이예르홀트에게만은 따뜻한 시선을 견지했다. 1924년 므하트의 해외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스타니슬랍스키는 “이 모든 무대 혁신을 이룩한 발명가들의 무대 지식과 그들이 소유한 구상, 재능, 다면성, 대담성, 기지, 재치, 미감 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들에게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는 말로 메이예르홀트의 실험에 지지를 표하기도 했다. 이처럼 1920년대 두 사람의 관계는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그 자체였다.

                                                                 집필 중인 스타니슬랍스키

 화해와 접촉의 시기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극단적 대결을 압축한 듯하던 두 사람의 대치전선은 1930년대에 와서는 전혀 다른 구도로 전개된다. 스타니슬랍스키는 메이예르홀트의 생체역학을 일부 차용하여 신체행위법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을 개진했고, 메이예르홀트는 <동백꽃 부인>(1934) 공연에서 특유의 양식화를 제거하고 내면적 심리묘사와 섬세한 동선을 강조하는 므하트 풍의 리얼리즘 연출술을 선보였다. 이렇게 두 사람의 미학은 마치 정반합의 변증법을 따라가듯 극단적 대립을 거쳐 접점을 모색하는 단계로 진화했다. 무엇보다 메이예르홀트의 개심이 눈에 띈다. 1937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스타니슬랍스키와 내가 적대관계라는 말은 잘못된 시각이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를 보완하는 두 개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 사이에 원칙적으로 중대한 차이는 없다. 우리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두 시스템에 대한 학술적 연구를 한다면 양자 간의 통일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시스템의 통일은 끝내 이뤄질 수 없었다. 30년대 중반부터 메이예르홀트의 정치적 입지는 급격히 축소되기 시작했고, 몰락의 초시계가 긴박하게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1934년 제1회 소비에트작가동맹에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가 소련의 유일한 예술방법론으로 확정되자, 아방가르드 색채를 띤 메이예르홀트 미학은 더이상 설 자리가 없었다. 1936년 당 내부에서 메이예르홀트는 형식주의자이자 자연주의자라는 비난이 등장했다. 그는 승복은 커녕 더 강경하게 자신의 미학을 옹호했다. 1938년 1월 7일 당중앙위원회 정치국은 “소비에트 예술에 적대적인 입장으로 넘어가 소비에트 관객에게 이질적인 극장이 되었다”는 이유로 메이에르홀트국립극장 폐쇄를 결정한다. 직위박탈은 숙청의 예고장과도 같다. 비밀경찰의 방문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동료들은 불똥이 튈까봐 잔뜩 몸을 움츠렸다. 대숙청의 칼날이 미친 춤을 추던 시기였다.

                                                         <검찰관> 연기시범을 보여주는 메이예르홀트


비극보다 비극적인

바로 그때 스타니슬랍스키가 메이예르홀트를 호출한다. 1905년 이후 두 번째이자 마지막 러브콜. 모두가 반대했지만, 스타니슬랍스키는 단호했다. 메이예르홀트는 ‘스타니슬랍스키국립오페라극장’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스타니슬랍스키 사후엔 수석연출가로 승진했다. 스타니슬랍스키의 비호가 없었다면, 메이예르홀트는 일찌감치 저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스타니슬랍스키는 자신의 예술적 양심을 속이고 메이예르홀트를 고용한 걸까? 당연히 아니다! 스타니슬랍스키는 자신의 예술적 신조를 양보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는 예전부터 메이예르홀트와의 협업을 꿈꾸고 있었다. 자신의 오페라극장 배우들에게 능동적 신체움직임을 지도해줄 유일한 연출가로 메이예르홀트를 오래전부터 점찍어둔 것이다. 메이예르홀트를 향한 비판이 점점 거세지고 그를 두둔하는 것 자체가 반역으로 간주될 때도 스타니슬랍스키는 대놓고 “내가 아는 유일한 연출가는 메이예르홀트다”라고 밝혔다. 심지어 1936년 자신의 사후 극장 운영과 관련해 메이예르홀트에게 므하트 분관을 맡기고 예술국 책임자로 앉힐 메모까지 작성했다. 제자들이 보면 기겁할 내용이지만, 스타니슬랍스키는 메이예르홀트의 이론과 재능 속에서 시스템이 나아갈 비전을 발견했던 것이다.    

불행히도 스승의 보호막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1938년 8월 7일 스타니슬랍스키가 영면에 든 것이다. 살얼음판 같은 나날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메이예르홀트의 기개는 꺾일 줄 몰랐다. 1939년 6월 15일 메이에르홀드는 ‘전국연출가회의’의 연단에 선다. “연극은 예술입니다. 예술성 없이 연극은 불가능합니다. 현재 극장의 실정이 어떤지 아십니까. 이 고루하고 따분한 연극들을 보세요. 천편일률적이고 창조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이게 여러분들이 원하던 바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주 무서운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겁니다.”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은 주류들을 향한 마지막 포효였다. 그리고 5일 후 6월 20일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간첩혐의로 사형선고를 받는다. 혹독한 고문 끝에 총살당한 날짜는 1940년 2월 2일이었다. 그의 시신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메이예르홀트 체포 25일 후인 1939년 7월 15일 새벽 그의 아내 지나이다 라이흐는 괴한들의 칼에 살해된다. 그녀의 몸에는 17군데 칼자국이 있었고, 병원에 가지도 못한 채 과다출혈로 최후를 마쳤다. 그녀는 예세닌이 묻힌 바간코프 묘지에 안장되었고, 수십 년 후 메이예르홀트란 이름이 묘비에 병기되었다.

                                            1939년 ‘전국연출가회의’에서 연설하는 메이에르홀드


여전히 유효한 질문

스타니슬랍스키와 메이예르홀트가 선명하게 그어놓은 리얼리즘극과 모더니즘극의 경계선은 20세기 연극사를 양분하는 표식이었다. 지난 100년간 연극은 스타니슬랍스키와 메이예르홀트라는 두 거봉을 오르는 등정과도 같았다. 거친 산세에 둘러가는 이도 있었고, 강파른 암벽을 수직으로 오르는 이도 있었으며, 깊은 동굴을 발견하거나 능선 사이를 유영하는 이도 있었다. 21세기 도래 후 19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구도는 변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여전히 묻고 있다. 스타니슬랍스키냐, 메이예르홀트냐!


                                                              메이예르홀트와 라이흐의 공동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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