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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솔라리스>와 타르코프스키의 시간
분류영화
국가 러시아
날짜2019-01-31
조회수1,461
첨부파일


















































인간은 보통 잃어버린 시간, 놓쳐버린 시간,
또는 아직 성취하지 못한 시간 때문에 영화관에 간다.
-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인간의 눈에는 사물들 사이의 관계라는 환상적인 형태(die phantasmagorische Form)로 보이지만
그것은 사실상 인간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일 뿐이다.
- 칼 마르크스, <자본론>


1. 타르코프스키의 시간: 원래 이 글은 영화의 ”질감 matière”에 관한 것이었다. 영화의 질감이 화면에 담겨진 시간의 리듬과 결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 한다면, 이 글은 영화 속에 재현된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타르코프스키 영화가 시간이라는 주제에 부여하는 의미의 크기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가 음악이나 몽타주, 리듬에 대해 말할 때도 그것은 결국 시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에게서 시간은 자주 회상이거나 기억이다.

영화 안의 사물들은 각각 ‘기억의 장소(lieux de mé́moire)’, 혹은 과거를 향한 문이 되어 시간들이 서로를 향해 열리고 이어지게 한다. 그에게 현재는 그 안에 응축된 과거 없이는 존재할 수 없거나 재현될 수 없다. 순수한 형태의 현재를 감각하게 하거나 응시하게 하는 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실제의 시간과 영화적 시간의 완벽한 일치를 꾀하는 경우에조차, 가령 <솔라리스>에서 터널을 지나가는 자동차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가는 장면마저도 시간을 감각하게 하는 것이라기보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알레고리에 가까워 보였다. 시간에 정신성과 윤리를 부여하려 했던 타르코프스키에게 과거는 말하자면 시간의 영혼이다. 기억이야말로 시간의 근거이자 종합이고 과거의 존재를 구성하게 함으로써 현재라는 순간이 움직여 나아가도록 만드는 힘이다. 그의 영화의 질감은 현재 안에 흔적을 남기고 있는 과거로부터 온다. 더 정확히는 그 과거가 사라지지 않고 현재 안에 새겨짐으로써 만들어진다. 그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시간을 조작하고 그것을 봉인한다. 그의 영화에서 시간은 변형되고 고양된다. 그의 영화는 시간의 회복이라는 기적에 대한 신앙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럼에도 주인공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 회복된 정신이 마지막에 향하는 곳은 지상, 땅위의 축축한 습지이거나 나무로 된 고향의 집이다. 영화는 시간의 통로이자 역경을 가로질러 그곳을 향해 가는 길이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그러한 의미에서 시간의 파사젠베르크(Passagenwerk)이다.

2. 시간의 질감: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적 시간은 가령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과 같은 영화 속에 그려진 종말의 시간의 대척점에 있다. 도(C)-레(D)-미(E♭)-레(D)의 16분 음표들의 아르페지오가 빠른 속도의 저음으로 계속되고 높은 성부에서는 E♭-D-C-C의 보다 웅장한 음향이 느린 속도로 울린다. 이 3시간 동안 계속 되는 음악(음향)은 영화에서 잠시도 멈추지 않는 몰아치는 바람의 소리이기도 하다. 이는 시간의 균질적인 움직임과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종말의 불안감과도 같다. 점점 어두워지는 영화의 화면과 거세어지는 바람, 멈추지 않는 음향과 그런데도 그저 계속되는 주인공들의 하루하루의 삶. 그걸 지켜보는 것은 지루하고 고된 체험이지만 아마 이것이야말로 벨라 타르가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허락하고자 했던 종말의 이미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종말이라는 사건에 대한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한 영화적 체험일 것이다. 지루하고 음산한 음향은 영화에서 그 어떤 사건보다 중요한 사건으로 현전한다. 우리는 시간 그 자체, 종말이라는 피할 수 없는 파국을 향해 가는 시간의 공포스러운 움직임을 겪는다. 영화가 우리 몸에 새겨놓은 시간의 질감은 그 어떤 극적인 사건들보다 더 오래 남는다. 혜성이 지구에 다가오고 좀비들이 설치는 지구 마지막 날에 대한 영화적 서사로는 감히 그릴 수 없었던 종말의 모습을 우리는 영화의 질감을 통해 ‘체험한다.’ 아마 정말 종말은 그렇게 올 것 같다. 마지막 남은 물 한 방울, 감자 한 개, 더 이상 불을 밝힐 기름이 없는 집과 금방이라도 그 집을 집어삼킬 듯한 바람… 장엄한 신화적 아포칼립시스가 아닌, 그저 일상의 시간의 끝에 찾아오는 종말에 대한 거장의 해석은 이처럼 자신의 마지막 영화의 ‘사건’이 아닌 영상과 음향의 ‘질감’을 통해, 말없는 암전을 통해 드러난다.


                                 
https://www.youtube.com/watch?v=tWYoqi4Kpw4


3. 사물과 환영: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이 지배하는 <토리노의 말>에는 사물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나마 있는 것들도 점차 비워진다. 그 안에는 과거의 흔적들이 없다. 움직임도 제거되어 간다. 영화는 순수한 시간의 현재성이 지배하는 무의 공간을 향해 다가간다. 그 마지막 무의 공간에서는 현재마저 사라진다.

이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세계를 채우고 있는 사물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사물들이 상징으로 이해되는 것을 몹시 싫어했던 타르코프스키이지만 그의 작품에는 그러한 의혹을 살만한 반복되는 기호들이 다수 존재한다. 물론 그것은 그 자체로 영화의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사물이다. 아크메이스트들이 강조했듯 “장미가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무엇인가를 상징해서가 아니라 장미 그 자체로 아름답기 때문”일테니. 그러나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사물들은 기억을 매개한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기도 한다. 혹은 마치 자기 인용과도 같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서사 외부의 사물의 서사를(혹은 시를) 만든다. 이것이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내러티브적 환상성과 구분되는 시네마토그래프적 환상성을 낳는다. <솔라리스>에서 가장 환상적인 장면은 우주선을 타고 날아가는 SF적 설정이 아닌 우주선 같지 않은 도서관 안의 무중력 상태에서 클로즈업 되는 사물들과 그림들, 그와 함께 들리는 바흐의 프렐류드와 이 모든 것을 낯선 눈으로 바라보는 하리의 어린아이와 같은 얼굴이 이루는 시적인 영상일 것이다.

사물은 시간이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하는 통로로 기능한다. 사물은 클로즈업되면서 다른 시간으로의 이행을 촉구하는 지시적 기호가 되고 시간의 주름들을 만들어 내면서 영화를 ‘판타스마고리아’의 공간으로 변화시킨다. 이 글에서 ‘파사젠베르크’는 벤야민의 신화가 된 저작(아닌 저작)의 아우라로부터 자유로운, 영화의 통로, 움직임, 흐름, 결합을 가리키기 위한 축어적 의미이지만 그가 주목한 19세기 파리의 산책자가 그 공간으로부터 느꼈던 환영과도 같은 느낌은 사물들로 채워진 타르코프스키의 공간에서 또한 다르지 않다. 그것이 마르크스가 말한 교환가치를 가진 상품의 물신적 환영은 아니라 하더라도 욕망의 표상들이 만들어 내는 매혹과 환상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타르코프스키의 경우 그의 일관된 유물론적 태도는 놀랍다. 일종의 유물론적 정신주의 혹은 유물론적 영성이다. 스타니슬라프 렘의 솔라리스는 ‘사유하는 물物‘의 정수이자 지젝이 지적하고 있듯 그 자체로 완전한 물 자체이다. 그것은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나의 타자로서 나이면서 동시에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곳을 지시한다. 그러나 끝까지 타자화된 채 남겨진 원작의 솔라리스와 달리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는 ’변화‘한다. 원작이 홀로 솔라리스 행성에 남아 바다의 표면을 응시하는 켈빈의 형상으로 끝난다면 타르코프스키의 켈빈은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상기되며 노스탤지어의 대상으로 기능하는 지상의 사물들로 회기한다. 그가 렘브란트가 그린 그림 속 돌아온 탕아의 모습으로 아버지의 발 아래 엎드린 순간 그의 내적인 여정은 끝이 나고 시간은 현재 속에서 완전히 화해된다. 타르코프스키가 솔라리스 행성에 자신의 친척들을 데려다 놓았다는 렘의 비판은 역설적으로 개인의 기억 속 노스탤지어의 사물들과의 재회를 통해 고향을 복원하려 했던 타르코프스키의 의도를 대변해 주고 있다.

4. 시간의 통로: <솔라리스>의 우주선 복도를 주목하게 된 것은 우연히 발견한 영화 세트의 스케치 때문이었다. 그 그림에서 주인공은 복도 안 깊은 곳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는데 마치 그의 질주는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뛰어드는 것처럼 보였다. <솔라리스>의 우주선 복도는 첨단의 기계인 동시에 폐허이기도 한 이중의 공간이다. 그것은 선험적 시간을 공간화 시켜 놓은 재현된 시간이다. 켈빈은 복도를 따라 움직여 방으로 다시 돌아온다. 복도에는 우주정거장 안의 환영들이 부유하고 중간 중간 시간이 고여 있는 것 같은 방에서 켈빈은 자신의 기억을 마주한다. 복도를 따라 걷는 시간에는 계속해서 나와 타자의 과거가 개입된다. 현재의 무매개성을 파괴하며 그 안에 과거의 잊고 싶은 기억들을 억지로 되살려 내는 <솔라리스>의 복도에는 타르코프스키의 시간의 윤리학에 대한 신념이 반영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솔라리스 행성의 우주정거장은 켈빈에게 연옥과 같다. 지상으로부터 솔라리스로 옮겨가 다시 지상으로 돌아오는 영화의 구조 속에서 솔라리스는 통과제의의 공간이 된다. 
 
그러나 곡선을 그리며 휘어져 있는 우주선의 복도는 원형의 폐허이기도 하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하리의 모습과도 같이 이 복도를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하리가 죽을 때마다 그녀의 숄은 사라지지 않고 쌓인다. 마치 경험을 보충하고 증거하는 기념품처럼. 켈빈은 반복되는 자신의 과거를 응시하며 그것을 생명 없는 소유물의 목록으로 정리한다. 하리는 켈빈의 기억 속에서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그것은 물화된 존재이지만 비유기적 존재이고 따라서 영원하다. 솔라리스는 시간의 무덤과도 같아서 지구로부터 도착한 이들이 그곳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여기에서는 두 가지 시간이 긴장을 이룬다. 지구-솔라리스-지구를 잇는 내러티브의 시간과 자신의 과거가 만들어 낸 환영들에 사로잡힌 영원히 순환하는 솔라리스의 시간.

그런데 지구에서 잊고 있던 노스탤지어의 사물들을 되살리는 매개가 되는 것도 다름 아닌 솔라리스의 공간이다. 지구로부터 가져온 다양한 기록들이 그 안에서 되살아난다. 회화예술, 책, 유년 시절의 기억을 담고 있는 비디오, 다큐멘터리, 화상 전화 등. 다양한 매체들이 솔라리스 공간에서 펼쳐진다. 지상에서 주인공의 어머니가 보고 있던 솔라리스에 대한 방송을 제외한다면 영화에서 솔라리스는 이 모든 미디어들을 포괄하는 초월적 미디어이자 거대한 판타스마고리아의 공간이다. 미디어가 담고 있는 것이 개인과 시대의 기억이라면 솔라리스는 그러한 기억들이 혼란스럽게 펼쳐지는 파사주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솔라리스는 곧 영화의 시공간과도 같다. SF의 외양을 하고 있는 <솔라리스>조차도 영화에 대한, 혹은 예술에 대한 영화로 읽힐 수 있는 가능성을 드러낸다.

켈빈은 창문 너머로 솔라리스의 바다를 바라본다. 바다를 응시하는 행위는 전체의 줄거리 진행을 중지시키거나 그것의 외부에서 일어난다. 처음 켈빈이 창문 너머의 솔라리스 바다를 바라볼 때 창문은 검은 어둠으로 채워져 있었고 따라서 우리에게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솔라리스의 바다는 영화 중간 중간에 전면화되어 삽입되었다. 이는 우리가 영화적 서사 외부에서 솔라리스의 바다를 응시하게 하지만, 이것은 바다가 우리를 바라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솔라리스의 공간은 그러한 두 응시가 서로를 마주하게 되는 공간이 될 것이다. 켈빈이 솔라리스 행성으로 날아가는 장면이 그의 두 눈의 클로즈업으로 표현되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5.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영화관에서 <솔라리스>를 다시 보면서 새로웠던 순간은 이 영화에서 공포영화의 주인공을 주시하는 카메라의 시선을 느꼈을 때였다. 켈빈이 처음 도착한 우주선의 복도에는 그를 감시하는 듯한 타자의 시선이 존재했다. 몰래 뒤따르는 카메라의 움직임, 어디서 무엇인가가 튀어나올 것 같은 긴장감은 음향에 의해서도 고조되었다. 방울 소리, 공이 굴러가는 소리, 어느 방향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손님들’의 정체, 스나우트 방에서 잠깐 스쳐 지나간 누워 있는 사람의 귀. <에일리언>의 우주선 내부와도 같은 서스펜스가 <솔라리스>의 복도에도 있었다. 그 시선의 주인은 그 안에 존재하고 있을 누군가의 ‘손님’일 수도, 혹은 우리를 응시하는 솔라리스 바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다가 등장할 때면 이상한 전자음이 따라 나왔다. 그 전자음은 초반 6분 이상 지속되는 고속도로 장면에서의 음향과도 비슷했다. 바다와 고속도로는 전자음을 통해 하나의 의미장 속으로 결합되었다. 그것은 각각 시간의 응시와 시간에 대한 응시였다. 하리가 지상의 풍경과도 같은 브뤼겔의 그림 구석구석을 보는 순간에도 이와 유사한 음향이 삽입되어 있다. 이 역시 지상의 시간을 향한 초월적 시선으로서 솔라리스 바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이들은 켈빈의 스스로에 대한 적대적 시선의 편에 서 있다. 이에 대비되는 것이 지상으로부터 가져온 비디오의 어머니의 모습, 눈 덮인 러시아의 풍경, 모닥불과 같은 지구의 사물이 담고 있는 노스탤지어의 시선이다. 이 둘은 켈빈을 축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샤갈의 그림을 재현하는 것도 같은 무중력 상태에서, 켈빈이 하리와 하나가 되고 시간과 공간이 결합하는 마법과도 같은 순간, 비로소 켈빈은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고 영화 속에 분리되어 있던 시간들 간의 긴장은 사라지게 된다. 차갑고 불안한 타자의 시선은 노스탤지어의 시선 안으로 녹아든다. 전자음을 배경으로 하리의 눈으로 조명되던 브뤼겔의 그림은 이제 비로소 종교음악 안으로 녹아들고 러시아의 눈 덮인 풍경으로 이어져 동일성을 얻는다. 하리는 켈빈의 상처를 치유하던 어머니와 겹쳐지며 하나가 된다. 이젠 솔라리스의 바다 또한 더 이상 정체불명의 전자음이 아닌 종교음악을 배경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며 그것은 지구로 귀환한 켈빈이 바라보는 연못의 풀들의 움직임으로 치환된다.  

처음 장면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그래서 어쩌면 지금까지의 사건들이 그저 켈빈의 꿈 혹운 상상에 불과한 것일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을 부정이라도 하듯 켈빈이 향하는 아버지의 집이라는 원형적 공간은 <노스탤지어>의 마지막 장면처럼 불가능한 공간으로 변화한다. 그 안에는 물이 흐르고 있으며 솔라리스의 우주의 흔적들을 간직한 사물들이 펼쳐져 있다. 원작에서는 끝까지 불가능했던 “물(物)자체로서의 나”를 향한 절대적 응시의 문제는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에서 하리와 어머니, 사랑과 지구의 대지를 통한 인간의 기억에 대한 치유로 승화된다. “반복되는 대상 안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복을 응시하고 있는 정신 안에서는 무엇인가 변하고 있다.”(D.흄) 솔라리스 우주선의 미로와 같은 복도는 켈빈이 자신의 기억을 펼쳐내고 그것을 반복적으로 바라봄으로써 구원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시각장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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