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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렘브란트. 카라바조. 뭉크. 그리고 니콜라이 게 (Н. Ге)
분류회화
국가 러시아
날짜2019-01-15
조회수1,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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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이 문화적 기반으로 자리 잡고 있는 유럽 지역의 화가들은 숙명적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역사를 담은 성서로부터 작품의 모티프를 가져오곤 했다. 성서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견주어 결코 뒤지지 않는 회화의 소재이자 여러 화가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작품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기원이 되어왔다. 러시아 화단 역시 이런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몽고의 침입으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유럽의 르네상스로부터 단절되었던 러시아는 유럽이 이미 근대의 세례를 받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성서의 내용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담은 이콘이 화단을 지배해왔다. 18세기 이후 서유럽 화풍의 초상화와 풍경화가 이콘의 자리를 대신할 즈음에도 그리스도와 성서의 내용은 여전히 러시아 화가들의 단골 소재가 되곤 했다.

자신의 화폭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담은 러시아 화가 중에 특히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게(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Ге)’의 그림이 눈길을 끈다. 

젊은 시절 한 때 유럽과 로마, 플로렌스 등을 돌며 작업하던 니콜라이 게는 1869년 마침내 페테르부르크로 귀국하여 ‘이동파’ 화가들과 적극적인 교류를 가지면서 이동파 전시회에도 작품을 출품하게 된다. <표트르 1세, 페테르고프에서 황태자 알렉세이 페트로비치를 심문하다>라는 작품은 바로 첫 번째 이동파 화가 전시회를 위해 니콜라이 게가 작업한 그림이다. 이 작품은 남다른 대중의 관심과 친화력을 발휘하며 사랑을 받았고, 머지 않아 파벨 트레티야코프의 갤러리에 걸리게 된다. 



<표트르 1세, 페테르고프에서 황태자 알렉세이 페트로비치를 심문하다> (니콜라이 게 作, 1871年)


이후 니콜라이 게는 페테르부르크에 남아서 러시아 인텐리겐치야 인사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작업에 몰두하면서 역사화 작업을 병행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급기야 물감을 사기 힘든 재정적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금전적인 어려움을 견디기 힘든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시골의 한적한 마을로 이주하게 된 니콜라이 게는 잠시 그림 작업을 멈추고 한동안 종교와 도덕의 문제에 몰두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고, 이후 일련의 종교화 시리즈를 제작하게 된다. 하지만 말년의 니콜라이 게가 제작한 종교화 시리즈는 러시아는 물론 해외에서도 이렇다 할만한 평을 전혀 얻지 못한 채 대중으로부터도 외면당하게 된다.

화파로 따지자면 니콜라이 게는 일반적으로 ‘이동파’에 속하는 화가로 분류되곤 한다. 하지만 그의 그림, 특히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힘들었던 그의 말년에 종교적 테마를 중심에 두고 제작된 작품들은 이동파의 사실주의적 성향보다 오히려 ‘인상파’적인 화풍과 ‘표현주의’적인 화풍이 묘하게 뒤섞여있는 느낌을 자아내면서 더욱 눈길을 끈다.

얼핏 뭉크의 <절규> 안쪽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소리 없는 외마디 비명, 고흐의 말기 작품에서 느껴지는 광기 어린 붓터치, 카라바조의 작품에서 절제되다 못해 억눌려진 빛으로 인해 느껴지는 음울하고 음산한 분위기가 한꺼번에 느껴지는 니콜라이 게의 말년 대표작 중에서도 비교적 대중에게 잘 알려진 <진리란 무엇인가>는 표현 양식에 있어서 어쩌면 상당히 평범한 축에 속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진리란 무엇인가> (니콜라이 게 作, 1890年)


이 작품에서 그리스도와 본디오 빌라도는 대위법적 구성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

니콜라이 게는 진리를 대표하는 빛과 그에 반하는 어둠을 역설적인 구도로 배치시키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진리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그리스도가 벽을 등진 채로 어둠 속 그림자에 속에 위치해 있으며, 그가 말하는 진리가 과연 무엇인지 확인을 얻고자 하는 본디오 빌라도가 전면으로 빛을 취하는 구도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빛이 조명하고 있는 대상은 본디오 빌라도가 아닌 그리스도와 본디오 빌라도 사이에 놓인 공간,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가 발을 딛고 있는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구도상으로 볼 때 본디오 빌라도의 정면은 빛을 받고 있지만, 정작 그의 얼굴은 마치 빛을 외면하듯 측면을 향하고 있다. 반대로 그리스도는 얼핏 어둠 속으로 내몰린 듯 벽을 등지고 서 있지만, 빛이 쏟아지는 방향을 향해 정면으로 선 채 빛을 마주한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본디오 빌라도가 발을 딛고 선 땅이 빛으로 조명되고 있지만, 그의 좌측 어깨 부분이 암흑으로 뒤덮여있는 것 역시 눈길을 끈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가 발을 딛고 선 지상은 어둠에 침잠된 것처럼 보여지나, 그를 둘러싼 주변은 오히려 환한 빛으로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마치 본디오 빌라도가 서 있는 세계가 순간적인 빛으로 조명되다 곧 사라져버릴 세계이고, 그리스도가 발딛고 있는 지상은 어둠에 잠겼지만 곧 그로 인해 빛으로 밝혀질 세계라는 성서적 메시지를 묵시적으로 드러내는 듯 하다.

어쩌면 그리스도로 대표되는 ‘절대적인’ 진리는 ‘이 곳’이 아닌 ‘저 곳’에 속한 대상이기에 ‘절대 진리’, 혹은 ‘절대 선’으로 지상에 임한 그리스도는 이미 처음부터 지상에서 추앙받는 ‘찰나의 진리’ 혹은 세속의 영광과 양립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니콜라이 게의 그림에서 본디오 빌라도와 그리스도의 사이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굵은 빛줄기는 바로 이러한 ‘지상에서의 선’과 ‘절대 선’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과 양립불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한편 이 그림에서 그리스도의 시선은 본디오 빌라도가 건네는 손끝을 향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향해 건네는 본디오 빌라도의 손은 마치 없는 죄를 만들어서라도 세상에서 ‘강요’하는 죄를 인정하면 억지로 만들어진 그 죄에 대한 면죄부를 주겠다는 유혹의 손길처럼 비춰진다. 니콜라이 게는 본디오 빌라도가 제안하는 거래에 잠시 잠깐 흔들리는 듯 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매우 섬세한 붓질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형상 주변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붓터치가 느껴지는데, 이는 광야에서 기도 중에 맞닥뜨린 사탄의 유혹에서 시작하여 십자가에 매달린 채 죽어가던 마지막 순간 ‘아버지 정녕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인간적인 부르짖음으로 절규하던 순간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 인간과 신의 경계에서, 혹은 지상에서의 삶과 천상의 영원한 진리 사이에서 갈등하고 번민했던 ‘인간 그리스도’의 심리적 동요 상태를 압축적으로 표현해낸다.

하지만 이와 달리 그리스도의 눈은 비록 눈동자가 명확지 않게 묘사되었음에도, 그의 눈빛은 전혀 공허하지 않고 오히려 본디오 빌라도의 손끝을 꿰뚫을 듯 살아있다. 마치 이콘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세상을 관통하는 눈빛’이 니콜라이 게의 그림을 통해 현대적 화풍 속에 되살아난 듯한 느낌이다.

니콜라이 게의 또다른 대표작 중 하나인 <최후의 만찬>이라는 작품은 비교적 초기작에 속하는 작품으로 말년의 작품들과는 달리 비교적 깔끔하게 정리된 윤곽선과 카라바조의 바로크적 음울함이 느껴진다. 또한 이 그림은 니콜라이 게에게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명성을 안겨준 특별한 작품이기도 했다. 이 작품이 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 가을 전시회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대중과 평론계는 엄청난 찬사와 반향을 쏟아냈으며, 검열기관에서는 작품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모작’ 금지 명령까지 내렸다. 이후 니콜라이 게의 <최후의 만찬>은 러시아 황실 컬렉션에 포함되었고, 바로 이 작품으로 게는 학술원 정회원 자격과 교수직을 얻게 된다. 

 

<최후의 만찬> (니콜라이 게 作, 1863年)


니콜라이 게의 <최후의 만찬>은 이후 그려진 <진리란 무엇인가>와 비교해 볼 때 묘사의 수준에 있어서 훨씬 더 사실주의적인 필치에 가깝게 그려진 작품이다. 하지만 빛을 중앙에 두고 대위법적인 구성을 위한 장치를 사용하는 점이나, 빛과 어둠으로 인물의 상징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최후의 만찬>은 훗날 <진리란 무엇인가>를 완성하기 위해 하나의 디딤돌이 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본디오 빌라도와 그리스도에게 빛과 어둠을 역설적으로 적용시킨 <진리란 무엇인가>와 달리, <최후의 만찬>에서는 빛은 말 그대로 ‘빛의 존재’인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가롯 유다는 어둠 속에 파묻힌 존재로 그려져 있다. 작품 속에서 가롯 유다가 겉옷을 걸치는 행위는 그리스도와 제자들 뒤편에 위치한 벽에 그대로 투사되며 거대하고 음산한 실루엣으로 형상화 되고 있다. 니콜라이 게는 이러한 구성을 통해 행위의 주체인 가롯 유다가 자신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 모두를 어둠이 상징하는 불행으로 뒤덮을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니콜라이 게의 <최후의 만찬>은 사복음서 중 요한복음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함께한 최후의 만찬에 대한 기록은 사복음서에서 모두 나와있지만, 유다가 최후의 만찬 자리를 뜨는 장면은 유일하게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게의 그림에서 빛이 그리스도를 비추고 있지만, 가장 밝은 빛으로 조명되는 대상은 그리스도가 아닌 두 명의 제자이다. 복음서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한 명은 ‘베드로’이고, 다른 한 명은 그리스도가 가장 사랑한 제자로 아마도 ‘요한’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좌측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요한과 그러한 요한에게 귓속말을 속삭이며 ‘배신자’가 누구인지 추정하려는 베드로의 모습은 게의 작품에서 가장 빛을 많이 받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게의 작품에서 두 제자보다 더 밝은 빛을 받는 대상은 따로 있었으니, 다름 아닌 바로 만찬을 마친 테이블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리스도를 포함한 성서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면면과 그 반응에 집중했던 다빈치와 달리, 니콜라이 게는 아마도 만찬 그 자체, 사건 그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 듯하다. 실제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그리스도 스스로 자신이 제자 중 한 명에게 배신을 당하고, 그로 인해 곧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선포했기 때문에, 만찬은 그 자체로 충분히 ‘주인공’ 감이 될 수 있는 대상이다 (“나를 배반할 자의 손이 지금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다”, 눅 22:21).

다른 한편으로 <최후의 만찬>에서 니콜라이 게가 빛을 다루는 방식은 렘브란트의 <야경꾼>이라는 작품을 연상시킨다. 



<야경꾼> 혹은 <프란스 버닝 코트 대장 부대의 반격> (렘브란트 作, 1642年)


<야경꾼> 혹은 <야간순찰대>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진 렘브란트 작품의 원제는 <프란스 버닝 코크 대장 부대의 민병대>이다. 이 작품은 본디 배경이 지금과 같이 어둡지 않았는데, 본 그림의 색채를 보존하기 위해 니스를 덧입히고 다시 바래는 과정 중에 지금처럼 마치 ‘밤’에 뭔가 일어나는 사건처럼 인식되었고, 대중들 사이에서 원제보다 현재의 이름으로 더 유명해졌다.

렘브란트의 <야경꾼>의 경우, 본디 그림의 주인공은 중앙에 위치한 코크 대장과 그보다 한층 더 우아한 의상을 차려입고 대장의 우측에 서 있는 루이텐부르크 중위이다. 하지만 이들보다 한층 더 밝은 빛을 받고 있는 존재는 코크 대장 좌측 뒤편에 위치한 소녀, 혹은 노파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뒤쪽 허리춤에 닭을 매달고 있는 이 소녀 (혹은 노파)가 상징하는 바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매우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소녀의 허리춤에 달린 닭이 대상의 성씨인 ‘코크’를 비유한 것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닭발을 거꾸로 한 모양이 바로 이 그림의 묘사 대상이 된 부대의 문양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렘브란트가 사랑했던 아내 사스키아라는 말도 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밝은 빛을 받는 소녀로 인해 주변의 다른 인물들의 행동에 더 눈길이 간다는 점이다. 빛을 정면으로 받고있는 코크 대장과 그를 보좌하는 중위의 경우, 빛을 의식해서 인지 뭔가 부자연스럽고 ‘보여주기 위한’ 제스처를 취하는 모양새이다. 이들의 의상이 유독 화려한 것 또한 빛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제외한 다른 주변의 민병대원들은 상대적으로 빛을 덜 받으면서 어스름에 가려진 상태로 묘사되어 있다. 그 때문일까? 대장과 대위를 제외한 민병대원들은 각자 저마다의 일에 매우 분주한 모습이다. 마치 빛이 가려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평소에는 숨겨왔던 인물 각각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고 있는 듯한 모양새이다.

<야경꾼>에 담긴 인물들은 저마다 자신이 원래 ‘빛’이 되거나 ‘빛’속에 거하는 존재로 묘사되길 원했지만, 렘브란트는 빛이 아닌 곳에서 드러나는 진정한 얼굴을 그리고 싶어했던 것 같다. 당연히 그림을 의뢰한 <야경꾼> 속 인물들은 렘브란트가 그려낸 자신들의 ‘진짜’ 모습을 수용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렘브란트는 <야경꾼> 이후 줄곧 삶의 내리막 길을 걸으면서 초라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천편일률적으로 일렬종대로 늘어선 채 자연스러운 자신의 얼굴이 아닌 ‘만들어진’ 얼굴, 진정한 얼굴이 아닌 세상에 드러내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모습으로 그려진 집단초상화를 그린 작가들과 렘브란트가 차별화되고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는 것이 아닐지...?

니콜라이 게 역시 눈에 보이는 실재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를 탐색하고 그것을 화폭에 담아내려고 했다는 점에서 렘브란트와 유사한 길을 걸었다 할 수 있다. 빛을 받고 있지만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얼굴에 의해 진짜가 가리워진 본디오 빌라도의 모습과 어둠에 가린 듯이 보이지만 오히려 진리를 갈구하듯 살아있는 눈동자를 지닌 그리스도의 형상은 렘브란트의 야경꾼들에 비추어 볼 때 이렇듯 묘한 울림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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