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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현대 중국의 기독교
분류철학과 사상
국가 중국
날짜2017-04-10
조회수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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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종교가 많은 국가이다. 현재 중국 정부에서는 개신교, 가톨릭, 불교, 도교, 이슬람교 등 5대 종교만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중에서 현대 중국의 기독교에 대해 전반적으로 살펴본다. 무릇 기독교가 처음 중국에 들어온 것은 635년(당태종 9년)으로, 약 1360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는 당대에 처음 중국에 전래된 이래 몇 차례의 수용과 소멸을 거듭하는데, 통설에 의하면 기독교는 4차례에 걸친 전래가 있었다. 기독교의 여러 교파 중에 가장 먼저 중국에 들어온 것은 네스토리우스파(斯托利派)로서, 페르시아에 의해 전래되었다. '경교(景敎)'라고도 불리는 기독교는 635년부터 210년간 당조의 수도인 장안, 낙양, 섬서성, 사천성과 양주 이남을 중심으로 전파되다가 845년에 당무종에 의해 금교되었다. 제2차 전래(1280-1353)는 원대인 13세기로서 400여 년간의 공백기를 거쳐 네스토리우스파의 기독교가 다시 중국에 들어오고, 한편으로 로마천주교인 프란체스코회가 몬테코르비노(J. Montecorvino) 선교사에 의해 원의 수도인 캄발럭(지금의 북경)에 전래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기독교는 주로 몽고인에게 수용되고 한인에게는 거의 전파되지 않았으므로, 그 뿌리를 내리지 못하다가 1368년 원조의 멸망을 따라 자연히 소멸되었다. 세번째 전래는 명말청초(1552-1724)에 이루어졌는데, 예수회 소속의 신부인 사비어(Xavier)가 1552년에 광동성에 도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어서 마테오릿치, 아담 샬(Adam von Schal), 회르비스트(F. Verbiest) 대표로 하는 예수회 신부들이 북경에 도착하여 그들이 지닌 우수한 과학지식으로 황제의 우대와 총애를 받으며 교세를 확장하게 된다. 이때 마테오릿치는 선교전략으로써 기독교의 '중국화'를 시도하여 정기적으로 공묘에 가서 제사하고, 입교한 중국인들에게도 예법에 따라 계속 공자와 조상에게 제사지낼 것을 허락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중국 경전 중의 '天'과 '上帝'로서 기독교의 '하나님'을 억지로 비유하였는데, 마테오릿치와 예수회의 이러한 선교방법은 후에 우상숭배 문제로 '전례논쟁'을 일으켜 급기야 중국황제와 교황 사이의 권위의 충돌로까지 발전하였다. 이 충돌은 강희황제로 하여금 1720년에 금교를 결정하게 하고, 옹정제와 건륭제도 그의 뜻을 이어 서양선교사에 대해 엄격한 조치를 취하게 하였는데, 1724년에는 황제의 칙령이 공포되어 천문학자를 제외한 모든 서양선교사들이 추방되었다.
현재 '하나님'을 중국어에서는 '上帝'와 '神' 두 가지로 다 사용하고 있는데, 대륙에서는 '神'을 대만, 홍콩과 동남아국가의 화교들은 '上帝'를 사용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上帝'는 중국의 우상문화 속에서 생겨난 단어로서, '유일신 하나님'을 뜻하는 영어의 'God'과는 내포하는 문화적 의미가 다르다. 따라서 문화적인 측면에서 볼 때, '神'이 'God(하나님)'에 대한 바른 번역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중국대륙에서 만든 성경에서는 '神'자 앞에 반드시 한 칸을 비워둠으로써 유일신 하나님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곧 여호와 하나님의 본질인 창조주이며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유일신의 의미를 잘 나타내주는 단어라고 말할 수 있다. 네번째(1807-현재)로 기독교가 대규모로 북경, 상해, 광주 등지로 전래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1807년 영국런던기독교의 신교선교사인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성경번역자로서, 중국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중국어사전을 편찬하고 성경을 완역해내었다. 런던선교회 소속의 다른 선교사들도 그의 뒤를 이어 언어연구와 문서보급에 주력하였다. 그러다가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문호가 개방되었고, 1884년 중국과 프랑스간의 황포조약(黃浦條約)을 체결하자 천주교를 중국내에서 전도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기 시작했다. 그 후 각국의 전교사들은 중국 내륙으로 깊숙히 들어와서 교회를 건립하고 전도 활동을 활발히 재개하였다. 이로부터 1949년 중국인민공화국 성립까지 영국, 미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 각국 교파의 선교사들이 계속 중국으로 들어와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다. 이들은 문화교육사업, 의료사업과 출판사업을 복음을 전파하는 주요수단으로 삼아서 선교사역에 훌륭한 효과를 거두었으며, 중국의 전통우상문화를 기독교문화로 바꾸는데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서구제국주의 열강의 사주를 받은 일부 거짓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와 반기독교 행위를 저지름으로써 의화단에 의해 수많은 선교사와 중국의 성도들이 잔혹하게 학살당하였고, 중국정부와 일부 중국인들이 기독교를 배척하고 비판하는 데 빌미를 제공하였다. 신문화운동 기간에는 과학과 민주만을 신봉하는 청년들에게 미신으로 간주되어 1922년 3월에 반기독교운동이 일어났으며, 국민당과 공산당사이의 국공합작 기간인 1924-1927년 동안에는 기독교와 교회가 서구제국주의의 문화적 침략의 도구라는 이름으로 혹독한 공격을 받았다. 중국의 교회들은 자구책으로써 외국선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독립적인 교회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래 1980년대의 경제개방 이전까지 중국교회는 문화대혁명이라는 대 환난 속에서 삼자교회와 가정교회의 형태로 그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다가, 개혁개방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있다.

 

 

그림 1 베이징 한 교회에서 미사를 기다리는 사람

 

이어서 중국의 종교 정책에 대해서 알아본다. 실제로 중국 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헌법 제36조에 의하면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 국가기관, 사회단체 및 어떠한 개인도 공민에게 종교신앙 또는 종교의 불신앙을 강제할 수 없으며 종교를 갖는 공민과 종교를 갖지 않는 공민을 차별해서는 안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처럼 중국에서 신앙의 자유란 각 개인의 주관적인 신앙의 권리를 의미한다. 하지만 종교 활동은 정부가 통제와 관리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반드시 지정된 예배장소에서, 지정된 애국적 성직자들에 의해, 그들의 지정된 교구 내에서 지정된 시간 동안에 행해지는 종교활동을 해야 한다. 만약 어떤 종교적 활동이 애국적 단체들의 지도와 감독을 벗어나 행하여진다면, 이것은 불법적 종교활동으로 간주되어 금지된다. 특히 외세의 간섭을 철저히 배격한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사회주의 관점에서 보면 교회는 토지를 소유해 왔기 때문에 계급투쟁의 대상인 대지주나 다름이 없고 성직자는 반공주의자이다. 여기에 서구 열강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 서양의 종교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앞잡이 역할을 했던 사례도 한몫을 한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1950년 삼자애국운동(三自爱国运动)을 제창하고 종교 강령으로 삼았다. 삼자(三自)란 스스로 교회를 다스린다는 '자치(自治)', 경제적인 자립을 의미하는 '자양(自養)', 중국인 스스로 복음을 전파한다는 '자전(自傳)'을 말한다. 당시 정부는 '자전(自傳)'을 빌미로 외국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자치(自治)'를 내세워 종교별 애국회를 설립하였다.

1957년에 정부 주도로 세워진 '중국 천주교 애국회'의 선언문을 보면 애국회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그 주된 내용들을 살펴보면, 첫째, 기독교인들은 중국공산당의 4개 견지(즉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모택동 사상의 견지, 중국공산당 지배의 견지, 인민들에 의한 민주주의적 독재의 견지, 사회주의 노선의 견지)를 지지해야 한다. 둘째, 기독교인들은 정치와 교육, 그리고 결혼이나 가족계획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셋째, 기독교인들은 18세 이하의 사람들에게는 전도하거나 세례를 줄 수 없다. 그들은 병자를 위해 기도하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넷째, 기독교인들은 국가의 모든 법률과 정책들을 따를 것이며, 외국으로부터 오는 경제적 원조와 문서, 그리고 성경을 포함한 모든 외국교회들의 침투에 단호히 저항해야 한다. 다섯째, 교회들은 지정된 장소, 지정된 사람, 지정된 구역과 지정된 시간에만 집회활동을 해야 한다.

이처럼 비록 중국은 겉으로는 신앙의 자유를 명시하고는 있지만, 원칙적으로 중국정부는 모든 종교단체를 정부기관에 소속시키고 그 종교활동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중국정부가 종교에 대해 가장 민감한 부분은 바로 종교가 정치성을 띠고 반정부활동을 벌이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정부는 불법종교단체가 수적으로 성장하는 것과 일시에 모이는 집회에 참가하는 수가 많아질 경우에는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이 집회를 해산시켜 버린다. 그러나 20-30명이 모이는 조용한 소규모집회 같은 경우는 정치성을 전혀 띠지 않으므로 중국공안으로서도 특별히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 없이 관망하게 되는데, 그들로서도 각 나라에서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그 많은 선교사들을 일일이 검거하여 추방하는 일이 수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림 2 베이징의 4대 성당 전경

 

1949년 건국 당시 중국의 기독교 신도는 당시 인구 약 5억4000만명의 0.8%인 430만 명 에 불과했다. 그 이후 사회주의 체제가 본격 출범하면서 종교를 아편으로 규정하고, 극좌 노선의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이들은 된서리를 맞았다. 그러다 1978년 등소평이 개혁개방 정책이 추진되면서 1980년 기독교 인구는 600만 명으로 늘어났다. 1990년대엔 농촌사회를 중심으로 교회부흥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경제성장 속도가 빨라진 2000년대에 들어서자 도시 중산층에까지 기독교가 확산됐다. 열심히 일하면 누구든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기독교 복음주의 세례를 받은 민간 기업인들이 거액을 기부해 교세 확장을 도왔다. 요즘은 지식인층도 가세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중국인들이 교회를 찾는 이유가 급속한 사회변화에 따른 심리적 부적응 현상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이 약화하면서 생긴 정신적 공백을 종교가 메워 주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았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중국의 기독교 신자수는 1억명 넘었다고 한다. 중국 전체 인구의 약 8%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이처럼 최근 기독교 신자 수가 급증함에 중국 정부는 적잖게 고심하고 있다. 특히 중국에 입국하는 외국인 수, 그들과 중국인들의 경제 문화적인 교류, 인터넷, SNS 등 다양한 매체로 인하여 더욱더 기독교 신자는 늘어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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