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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로(文化路)
제목노벨문학상과 수상자를 둘러싼 정치적 메커니즘 - 미하일 숄로호프, 보리스 파스테르낙, 그리고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경우 -
분류문학
국가 러시아
날짜2015-10-12
조회수3,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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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문학을 비롯한 총6개 부문에서 노벨상이 수여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평화상과 문학상 부문에서 예상을 뒤엎는 뜻밖의 인물들이 호명되어 잔잔한 파문이 일어나고 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강력한 노벨 평화상 후보로 거론되었던 독일의 메르켈 총리와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종 수상자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고, 전혀 뜻밖의 대상인 '튀니지 국민4자대화기구'라는 단체에 수상의 기쁨과 소감을 천명할 기회가 돌아갔다.

                                       그림 1.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이러한 '뜻밖의' 수상자를 호명하게 되는 이례적인 사건은 문학상 부문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응구기 와 시옹오, 무라카미 하루키, 조이스 캐롤 오츠 등 쟁쟁한 후보들을 뒤로 하고 벨라루시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2015년 노벨문학상 최종 수상자로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우리에게 매우 낯설지만,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이미 2013년부터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 당시에도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그녀는 꽤 유력한 후보자로 거론되었지만, 2013년 최종수상의 영광은 캐나다의 여류 소설가 앨리스 먼로에게, 2014년에는 프랑스의 소설가 파트리크 모디아노에게 돌아갔다. 당시 그녀의 작품 «전쟁은 여성의 얼굴을 지니지 않았다»를 빗대어 «노벨문학상 수상자 명단은 여성의 이름을 지니지 않았다»라는 다소 농담 어린 이야기가 오가기도 했다. [1]
 
러시아에는 파스테르낙을 비롯하여 총5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존재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역시 모두 반체제적이거나 망명한 작가들이거나, 전쟁이 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닌은 수상 당시 이미 망명한 상태였고, 파스테르낙은 반체제적 성향으로 인하여 당시 소비에트 당국의 감시와 압박을 견디다 못해 수상을 거부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솔제니친 역시 문학가로서의 명성 만큼이나 반체제 인사로서의 명성이 드높은 인물이며, 브로드스키 역시 수상자로 호명될 당시 망명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숄로호프의 경우, 유일하게 스탈린 상과 레닌상을 수상한 작가이자 동시에 고국 소비에트에서 유일하게 인정을 받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로 주목이 요구된다.

여기서 잠시 노벨문학상의 본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노벨문학상은 «이상적인 방향으로 문학분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기여를 한 작가에게 수여»해달라는 알프레드 노벨의 유언에 따라 1901년부터 매년 1명의 작가를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상적인 방향이 문학적 이상보다는 점점 더 사회성과 시의성을 지닌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는 추세이다. 실제로 그동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명단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경우, 소설가나 시인인 경우가 많지만, 베르그송과 같은 철학자는 물론 처칠 같은 정치가도 문학상 수상자 명단에 올라가 있다. 순수한 문학가가 수상을 한 경우에도, 냉전 시대에는 주로 반공산주의적, 혹은 체제 비판적이거나 정치 사회적 메세지를 담은 작품에 수상 기회가 더 많이 주어졌다. 냉전 이후에도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을 둘러싼 다양한 스토리는 여전히 순수한 문학성 외에 서방 세계와  구 공산권 국가들 간의 힘겨루기가 수상에 개입하고 있다는 느낌을 자아내곤 한다.

사르트르는 노벨문학상을 둘러싸고 은연 중에 작동하는 정치적 메커니즘에 공식적으로 반기를 든 작가 중 한 명이다. 1964년 노벨상 수상자에 관한 공식 발표가 있기 며칠 전, 수상자로 지명된 프랑스 작가이자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는 스웨덴 아카데미에 수상을 거부한다는 내용과 더불어 다른 예술가에게 수상의 기회를 달라는 편지를 보내게 된다. 하지만 노벨상 위원회에서는 사르트르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호명했고, 사르트르는 파리에 소재한 스웨덴 대사관을 통해서 수상을 거부한다는 의지를 다시 한 번 단호하게 전달하면서, 자신은 이미 오래 전에 그 어떤 상도 받지 않기로 맹세했으며, 특히 특정한 정치적, 사회적 세계관과 그에 대한 공감을 은연 중에 강요하는 노벨상 위원회 및 재단에 자신을 엮을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뜻을 표명했다.  사르트르는 «오늘날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노벨상은 서구의 작가들에게 주는 상 혹은 동양의 고집쟁이들에게 주는 상으로 보인다. 칠레의 위대한 시인 중 한 명인 파블로 네루다도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다.[2] 노벨문학상 수상과 관련하여 충분히 그 상을 수상하고도 남을 자격을 갖춘 루이 아라곤에 대해 단 한 번도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숄로호프에 앞서 파스테르낙에게 노벨문학상이 주어진 것 역시 당연히 유감이다. 유일하게 노벨상이 수여된 소비에트 작품이 해외에서만 출판된 책이라니...»[3]
 
여러가지 우여곡절 끝에, 1965년 숄로호프는 마침내 노벨문학상 수상의 주인공으로 시상식장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숄로호프보다 먼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작가들, 즉 부닌과 파스테르낙을 비롯하여, 이후 브로드스키와 솔제니친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고국인 소비에트 공화국의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시상대에 섰다. 심지어 수상 거부를 강제로 종용 당하는 사건을 겪거나, 고국인 소비에트가 아닌 다른 국적을 지닌 상태로 반쪽 짜리 수상에 그치기도 했다. 하지만 숄로호프는 유일하게 고국의 정권으로부터 박수를 받으며 소비에트 국민으로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유일무이한 사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림 2. 1965년 숄로호프에게 수여된 노벨문학상 상장



   
                                                            그림 3. 노벨문학상을 수여받는 숄로호프


196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최종 호명되기 전까지 숄로호프의 이름은 이미 여러 차례 후보자 명단에서 거론된 바 있다. 그 역사는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고요한 돈 강»이 채 완성되기도 전인 193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숄로호프의 이름이 해외 언론에서, 그것도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 것은 바로 1935년 스웨덴 신문 지면을 통해서이다.  당시 숄로호프는 이미 «소비에트식 '전쟁과 평화»인 «고요한 돈 강»의 작가로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라 있었지만, 아직 작품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였기에 수상자 후보군에 오를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설령 숄로호프의 다른 작품들이 규모나 내용적인 측면에 있어서 "고요한 돈 강"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고요한 돈 강» 만큼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버금가는 사실적인 서사시이며, 내용적으로는 «전쟁과 평화»보다도 훨씬 더 비극적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1940년 마침내 «고요한 돈 강»의 집필이 끝났지만 노벨문학상 후보자를 심사하는 스웨덴 아카데미는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하여 또 한 번 숄로호프의 이름을 노벨문학상 후보 명단에서 내리게 된다. 바로 1939년에서 1940년에 걸쳐 일어난 소비에트와 핀란드 간의 전쟁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2차대전에서 히틀러의 봉쇄와 침략에 당당히 맞서 승리를 이끌어낸 소비에트 연방의 세계무대에서의 발언권이 점차 높아지면서 숄로호프의 이름은 다시 한 번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20세기 세계 문학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작가로 평가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2차대전 이후 시작된 «냉전»으로 인하여 숄로호프의 이름은 또 다시 수상자 명단에서 누락된다.

냉전이 절정에 이른 1948년에서 1953년 사이에 소비에트 문학에 대한 서방세계 독자들의 오해는 절정에 달하게 된다. «서방세계 독자는 소비에트 문학에 관한 표상을 소비에트 문학 그 자체에서 얻지 않았다. 심지어 소비에트 문학에 관한 비평적 소개글에서 얻은 것도 아니었다. 당시 소비에트 문학에 대한 표상은 모스크바의 문학 생태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관한 신문 기사를 통해 형성되어 나갔다. 서방 세계에서 우리는 소비에트 작가들이 집필한 작품의 미학적 가치나 문체에 관해 말하기 보다는 그들의 사회적 행동에 관해 토론하는 것에 더 몰두해 있었다. 실제로 우리에게 소비에트 문학 작품은 사회적 결론을 내기 위한 일차 자료로서 사용되었고, 순수한 의미에서 문학은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상이 되지 못했다».[4] 이미 냉전이 절정에 달했던1953년 윈스턴 처칠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사실 자체가 노벨문학상이 순수한 문학적 가치보다는 정치논리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미 이 시기부터 노벨문학상 수상작의 기준으로 천명된 «세계를 위해 공헌한 문학 작품»이란 단순히 «국경을 초월하여 보편적 인간의 정서»를 담은 작품이 아니라, «서방세계»라는 괄호 안에 묶인 다분히 한정적인 «세계»의 이익과 목소리를 위해 텍스트를 집필한 사람의 작품이라는 의미로 변질되었는지도 모른다. 혹자는 노벨문학상 수상작의 범위와 의미가 협의의 의미에서 보다 광의적인 의미로 확장되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순수 문학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그 대상과 의미가 더 협의적인 것으로 축소된 듯이 보인다.


  
                                     
                  그림 4. "고요한 돈 강" 제4권의 초반본                                       그림 5. 숄로호프 기념 우표
 

어쨌든 이러한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의 노벨상 위원회는 심사의 객관성과 공명정대함을 위해 러시아 원로 작가이자 소비에트 연방 학술원 회원인 세르게이 첸스키에게 늦어도 1954년 2월전까지 노벨상 후보를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넣게 된다. 세르게이 첸스키는 숄로호프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명해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적어서 답신을 작성했고, 당 차원에서도 숄로호프의 수상 후보 지명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참고로 말하자면, 소비에트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처음부터 스웨덴 아카데미 산하 노벨문학상 위원회의 후보 추천 의뢰에 적극적으로 반응한 것은 아니다. 1954년 1월,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한편으로는 여러차례 숄로호프의 이름을 쥐고 흔들며 다분히 괘씸한 행보를 이어나갔던 노벨상 위원회의 부적절한 정치적 성향을 폭로하면서 노벨문학상 제도 자체를 거부하겠다고 할 것인지,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문학의 우수성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후보자 지목에 동의할 것인지에 대해 먼저 토론을 진행했다. 다행히 대다수의 의견이 후자 쪽으로 기울면서 숄로호프를 1953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한다는 내용에 합의하게 된다. 세르게이 첸스키의 답신과 별개로 1953년도 노벨문학상 후보 추천에 대한 동의가 당 차원에서 최종 확정된 시점은 1954년 2월 25일이었다. 하지만 며칠의 시간이 지난 뒤, 1954년 3월 6일자로 노벨문학상 위원회에서 발신한 편지가 세르게이 첸스키 앞에 배달된다.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스웨덴 아카데미 산하 노벨상 위원회는 숄로호프에게 노벨상을 수여를 권고하는 당신의 제안을 관심있게 읽고 접수했습니다. 하지만 후보추천 제안서가 늦어도 2월 1일까지 심사위원회에 접수되어야 하는데, 당신의 후보 추천서는 올해 후보로 해당 작가를 검토 대상에 올리기에는 너무 늦게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위원회는 숄로호프를 1955년 노벨상 후보로, 즉 1956년에 그를 노벨 문학상 후보로 올릴 것입니다». 


노벨상 위원회에서 세르게이 첸스키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을 미루어 볼 때, 노벨상 위원회가 숄로호프를 수상자 명단에서 제외하게 된 '형식적인 측면'을 매우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전에 노벨문학상 심사위원회 측에서 세르게이 첸스키에게 보낸 바 있는 후보추천 관련 서한에서는 노벨문학상 후보자를 «2월 전까지» 알려달라고 명기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상식 선에서 볼 때, 이는 2월 중에 답변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2월 1일까지 답변을 달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세르게이 첸스키는 아마도 지정된 일자보다 약2-3일 가량 늦게  답신을 발송했을 것이고, 아마 지정된 시점보다 며칠 늦어지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노벨상 위원회에게 자신들이 선호하는 진영에 대립되는 소비에트 출신의 작가를 노벨상 후보에서 밀어낼 좋은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고, 결국 내년도 수상 후보자로 올리겠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이유로 숄로호프는 또 다시 노벨상에서 한 걸음 멀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듬해인1955년에도, 다음 해인 1956년에도 노벨문학상은 숄로호프와의 인연을 계속 비켜 나가기만 했다.[5]

파스테르낙의 소설 «닥터 지바고»가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출간되자 숄로호프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한 논쟁이 또 다시 점화되었다. 소비에트 국내 잡지와 출판사 편집부에서 거부당한 소설 원고는 1956년 5월 해외 출판사로 전달되었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번역 작업이 마무리 되어, 1957년 11월 15일에는 이태리어로, 이후 연말에는 영어와 노르웨이어, 프랑스 및 독일어 등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닥터 지바고»는 서방세계의 진보적 지식층 사이에서 전대미문의 빠른 속도로 읽혀나가면서 문학 비평가들의 주요 서평 대상으로 떠올랐지만, 정작 작가의 고국인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1958년 8월 24일까지 러시아어로 출판되지도, 읽혀지지도 못한 채 그늘에 가리워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벨문학상 위원회는 «닥터 지바고»를 «위대한 러시아의 서사적 전통»을 담은 작품이라는 표제를 달아 후보로 거론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닥터 지바고»와 파스테르낙에 대한 소비에트 내부의 반응은 냉랭했다. 학술원 회원 드미트리 리하쵸프는 «닥터 지바고»를 일컬어 «심지어 이건 소설이 아니라 자서전 종류»로 봐야 한다고 언급했고,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파스테르낙의 소설이 소비에트 연방에서 출간되지 않은 이상, 정확한 의미에서 볼 때 이 소설을 소비에트 문학작품으로 간주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성명을 내기까지 했다.[6]

파스테르낙의 소설이 세계 문학사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최초의 러시아 소비에트 작품인 것 마냥 떠들어대는 통에 소비에트 연방 당국 및 작가동맹의 심기는 영 불편하기 짝이 없었고, 이후 노벨문학상 수상자 후보를 둘러싸고 첨예한 정치적 싸움이 전개되어 나갔다. 1958년 4월 7일 당시 소비에트 작가 연맹 서기장이었던 마르코프(Г.М. Марков)가 당 중앙위원회에 쓴 편지의 일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


«얼마 전 스웨덴 펜클럽에서 노벨문학상 영역에서 가능성을 담보한 후보들에 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숄로호프, 파스테르낙, 파운드, 모라비아 등 총4명의 후보들이 논의되었습니다. 논의는 일반투표 형식을 띄었고, 논의에 참여한 절대 다수가 숄로호프에게 손을 들어줬습니다. 펜클럽의 후원을 맡고 있는 빌헬름 왕자도 숄로호프에게 자신의 투표권을 행사했지요. 이렇게 호의적인 분위기를 표하는 스웨덴 문화 인사들은 숄로호프의 수상 기회를 거의 실질적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추세입니다. 에릭 아스클룬드와 스벤 스토르크가 상의 수여 향방을 최종적으로 결정 짓는 스웨덴 아카데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신들의 친분을 이용하여 알아본 결과, 스웨덴 학술원의 고위층 중 몇몇 자들이 파스테르낙을 옹호하며, 숄로호프와 파스테르낙이 서로 상을 나눠가질 가능성에 대해서도 논의를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숄로호프 건과 관련하여 모쪼록 공명정대함이 승리를 거두기를 간절히 염원하면서, 우리를 지지하는 스웨덴 친구들이 숄로호프를 위한 투쟁 강화에 관한 요구의 목소리를 높여주기를 바랍니다.  소비에트 언론은 숄로호프를 위한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숄로호프의 국제적 인기에 관한 사실과 실례,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 내에서 그의 폭넓은 인지도에 관한 이야기는 그의 수상을 위해 충분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면서, 숄로호프 지지자들의 입지를 강화시켜 줄 것입니다. 해외에 거주하는 보다 영향력 있는 인사 및 문화 관련 소비에트 인사들이 숄로호프 건과 관련하여 스칸디나비아 반도 및 다른 국가들의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의견을 개진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닥터 지바고»에 관한 몇몇 서구 비평가들의 실질적인 평가는 당시 스웨덴 아카데미가 파스테르낙을 수상자로 선정하는데 아무런 영향도 발휘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런 날카로운 평가들은 정치적 칭찬과 이데올로기적 환호에 파묻혀 갔다.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공식적으로 발표되기 이전에 프랑스 주간지 «아르»는 1958년 1월 29일자 호에 ««닥터 지바고»는 문학적 의의가 아닌 정치적 의의에 힘입어 수상자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서방 세계에서 파스테르낙은 그의 작품을 접하기도 전에 이미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와 같은 글을 게재하게 된다. 그 외에도 독일과 프랑스, 네덜란드의 언론 역시 «닥터 지바고»에 관한 혹평을 쏟아냈으며, 심지어 나보코프(В. Набоков)는 파스테르낙의 «닥터 지바고»를 «병적이고, 졸렬하며, 허위로 가득 찬» 소설로, 그린(Г. Грин)은 «마치 사방팔방 흩뿌려진 트럼프처럼 뒤죽박죽인» 작품으로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러한 혹평은 곧 «소비에트 문학의 침체기는 1958년 «닥터 지바고»가 출현하기 이전까지 지속되었다»[7], «화려한 고독 속에 서있는 소설» «유럽의 베스트셀러», «다른 러시아의 목소리»[8] 등 강력하고 열정적인 수사학에 묻혀졌다. 심지어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하기 바로 전날 오스트리아 비인의 신문 «네이에 쿠리르»는 파스테르낙의 초상화 아래에 서명을 덧붙이고 «노벨상은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라는 삽화를 싣는 극단적인 행동까지 취했다.

파스테르낙이 최종 수상자로 결정된 1958년에는 소비에트 지도부가 직접 나서서 노벨상 위원회에 파스테르낙 대신에 숄로호프를 후보로 올리는 방안을 생각해달라는 요청을 넣기에 이른다. 파스테르낙은 소비에트 작가들 사이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작가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노벨상 위원회에서는 그런 청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당해 년도 노벨문학상 최종 수상자는 파스테르낙이 되었다. 하지만 소비에트 당국은 파스테르낙에게 스스로 수상을 거부하라는 압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했다. 1959년 4월 «프랑스-수아르»라는 프랑스 파리 석간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숄로호프는 소비에트 작가 연맹에서 파스테르낙을 제명시키고 노벨상 거부 압력을 넣었던 사건을 거론하면서 "당시 소비에트 작가 연맹의 집단 지도부는 이성을 상실했었다. "닥터 지바고"에 금서의 낙인을 찍지 말고 소비에트 연방에서 출판했어야 한다"는 당시로서는 꽤나 반소비에트적인 발언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말처럼 러시아 말도 끝까지 다 들어봐야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알 수 있는 것일까? 숄로호프는 이어서 다음과 같은 재치 있고도 다분히 독설 어린 대답을 남겼다.

«독자들이 파스테르낙의 이름을 논쟁의 중심에 서도록 만들지 말고, 그에게 패배의 쓰라림을 맛보게 했어야만 했다. 만약 그런 식으로 소비에트 작가 연맹이 움직였다면, 엄청나게 까다로운 우리 소비에트 연방 독자들은 파스테르낙이라는 이름을 벌써 잊어버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나는 유려하기 그지 없는 파스테르낙의 작품의 번역을 제외시킨다면, 그의 작품이 전반적으로 어떤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닥터 지바고»에 관해 말하자면, 내가 모스크바에서 읽어본 러시아어 초고는 소설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아무런 형태도 갖추지 못한 작품, 무정형의 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림 6. 2006년 러시아 학술원 고리키 세계문학연구소에서 발간한 "고요한 돈 강" 제1권의 필사본 아카데미 사본
 

노벨문학상 수상을 둘러싼 스토리와 별개로, 숄로호프의 이름을 둘러싸고 정기적으로 그의 작품에 대한 실제 집필 여부 및 저작권과 관련된 문제가 소비에트 문단 내에서 쟁점화되곤 했다. 실제로 «고요한 돈 강»이 집필되고 출판된 시기는 숄로호프가 아직 20대 초반에 불과한 시점이었고, 이로 인해 작품 출판 당시 많은 이들은 어떻게 그토록 젊은 사람이 짧은 시간 내에 방대한 양의 서사시적 작품을 집필할 수 있었는지, 스스로 경험하지 않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수많은 인간 군상의 모순과 고뇌를 어쩌면 그토록 세밀하고 섬세하게 그려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 놀라워했다. 하지만 그 놀라움과 경탄의 시선이 의심과 질투의 시선으로 바뀌는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몇몇 비평가들은 당시 소비에트 내전 당시 사망한 백군 진영의 병사가 실제 «고요한 돈 강»의 모티프가 되는 초고를 집필했고, 숄로호프가 우연한 기회에 그 원고를 손에 넣어서 '타인'의 자료를 자신의 스타일로 '개작'한 것이 오늘 날 «고요한 돈 강»이 되었다는 가설을 주장하고 나섰다. «고요한 돈 강»을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와 의구심 어린 눈초리로 인해 스탈린의 명령 하에 실제 작품 집필 여부 및 표절 여부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위원회가 소집되기까지 했다. 당시 위원회는 숄로호프의 초고와 친필원고를 모두 대조, 분석한 뒤에 작품의 저작권에 문제가 없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했지만, 이후에도 숄로호프의 저작권 관련 스캔들은 몇 번씩 반복되면서 그의 문학적 명성에 깊은 생채기를 냈다. "고요한 돈 강"을 둘러싼 숄로호프의 저작권 논쟁은 1999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당시 러시아 학술원 산하 고리키 세계문학연구소 소속 연구진들은 수십 년 간에 걸친 발굴 끝에 그 동안 잃어버린 것으로 알고 있었던 «고요한 돈 강»의 제1권, 제2권에 해당하는 필사본을 찾아내어 필체 감정과 문헌학적 감정을 통해 해당 필사본이 진본이라는 사실을 감정해냈다. 2006년에는 바로 그 필사본의 아카데미 사본이 공식적으로 출판되었고, 이로써 그 동안 수많은 논쟁거리를 양산해왔던 «고요한 돈 강»에 대한 숄로호프의 저작권 논쟁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그림 7. 발굴된 "고요한 돈 강"의 제1권 1장의 필사본 원본


숄로호프의 작품이 처음부터 소비에트 문단과 독자의 사랑을 받은 것은 아니다. «고요한 돈 강»은 출간된 직후 소비에트 작가들의 맹렬한 비판에 처하게 되었고, 오히려 백위군을 옹호하던 망명작가들에게 환대를 받는 아이러니를 겪은 바 있다. 당시 국가정치국의 수장이었던 하인리히 야고트는 다분히 조소 어린 말투로 숄로호프를 향해  «그래, 미샤, 넌 어쨌거나 반혁명분자야. 니가 쓴 «고요한 돈 강»은 우리보다는 백군에 더 어울리는 글이라구»라며 불만을 전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야고트의 독설과 달리 숄로호프의 소설은 스탈린의 칭찬을 받게 된다. 스탈린은 이후 집단화에 관한 소설 «개척되는 처녀지 Поднятая целниа»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그래, 우린 집단화를 실시했지. 여기에 대해 쓰는 것이 뭐 두려울 게 있단 말이야?»라는 말로 작품의 집필을 독려했다는 후문도 전해진다. 하지만 본디 작품의 원제였던 «땀과 피로 С потом и кровью» 대신 훨씬 더 부드러워진 표현인 «개척되는 처녀지»로 제목이 바뀐 사실로 미루어 보아 숄로호프의 작품에 전혀 소비에트 당국의 검열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고 말하긴 힘들 것 같다.

숄로호프의 작품은 이미 생전에 고전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의 이름은 해외에서도 유명했고, «스탈린의 총아»라는 별명까지 얻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회주의자'라는 달갑지 않은 꼬리표와 함께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스탈린은 숄로호프를 매우 아꼈고, 작업하기 위한 좋은 환경을 만들어줬다. 하지만 이러한 스탈린의 호의와 별개로, 숄로호프는 한편 스탈린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스탈린에게 끔찍한 기아의 현실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했고,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죽은 짐승의 시체부터 소나무 껍질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현실을 글로 전달했다. 하지만 이러한 숄로호프의 '문학적' 직언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숄로호프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었다. 스탈린의 총애는 숄로호프가 당의 '주문과 지시'에 따라 맞춤형 작품을 집필했다는 소문까지 낳기도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지 오래이다. 스탈린이 숄로호프에게 «고요한 돈 강»처럼 진실되고 생생하게 영웅적인 군인들과 위대한 장교들을 묘사한 소설을 써달라는 신호를 여러 차례 보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숄로호프는 자신이 의도한 바에 충실하게 전쟁에 관한 작품을 써내려 갔고, 그 안에서 «위대한 장교들»에 대한 이야기나 묘사를 억지로 삽입하지는 않았다. 또한 스탈린의 환갑을 맞이하면서 출판된 «고요한 돈 강» 제3권에서 스탈린에 대한 묘사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레닌과 트로츠키, 심지어 1812년 전쟁의 주인공들도 등장하지만, 유일하게 스탈린만 책의 어느 부분에서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숄로호프가 '스탈린의 총아', '기회주의자'라는 오명을 얻게 되기까지 결정적인 역할을 한 두 가지 사건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솔제니친과 사하로프의 반소비에트적 행위에 대한 반대서명을 감행한 것이었다. 숄로호프는 당대 명성이 높았던 다른 몇몇 소비에트 작가들과 함께 솔제니친과 사하로프의 반소비에트적 행동과 연설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단체 편지를 작성했고, 그 편지는 1973년 8월 31일 «프라브다(Правда)» 지면에 게재되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존경하는 편집장 동지! 소비에트 학자의 명예와 인격을 비난한 학술원 회원 사하로프의 행동과 관련하여 당신의 신문에 실린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공화국 학술원 회원들의 편지를 읽고, 우리는 편지를 보낸 학술원 회원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표명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소비에트 작가들은 늘 자신의 민중과 공산당과 함께 공산주의의 높은 이상을 위해, 세계를 위해, 민족 간의 우정을 위해 투쟁해왔습니다. 이 투쟁은  우리나라에 거하는 모든 예술 지식인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오늘날 이 역사적인 순간에, 전 세계 정치적 정황이 이로운 쪽으로 변화되고 있는 시점에, 우리 소비에트의 국가 및 사회체제를 비방하고 소비에트 국가의 평화주의적 정책에 대한 의구심이 생겨나게 하려는 사하로프와 솔제니친과 같은 자들의 행동, 본질적으로 서방 세계에 «냉전» 정책을 지속하라고 부추기는 자들의 행동은 깊은 멸시와 비난 외에 그 어떤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9]
당시 이 편지에는 숄로호프 이외에도 칭기스 아이트마토프, 라술 감자토프, 세르게이 잘리긴 등이 서명을 했다.

이 외에도 숄로호프 명성에 오점이 될만한 사건이 하나 더 있었는데, 이는 역시 반소비에트적 활동으로 기소된 시냡스키와 다니엘의 재판에 참여했던 일이었다. 이 두 경우를 제외하고 숄로호프는 더 이상 이와 유사한 류의 사건에 관여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오히려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사건 당사자들을 도와줄 방법을 찾곤 했었다. 숄로호프는 스탈린 앞에서 당당하게 아흐마토바를 비호하고 나섰으며,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뒤에는 소비에트 연방 내에서 그녀의 책이 출판되었다. 또한 숄로호프는 레프 구밀료프와 아흐마토바의 아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아들을 구명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당시 숄로호프는 마치 제2의 고리키처럼 작가들과 정치 인사들 간의 소통과 구명 창구로 역할하며 나름대로의 소신을 펼쳤던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숄로호프는 시냡스키와 다니엘을 옹호해달라는 수많은 청을 뿌리치고 이들이 감히 해외에서 반소비에트적인 작품을 출판했다는 비난 연설을 하기에 이르렀고, 이후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기회주의자'라는 달갑지 않은 꼬리표와 더불어 등 뒤에서 들리는 수군거림에 시달리면서 크나큰 심적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된다. 시냡스키와 다니엘에게 반대하는 연설을 한 뒤에, 마치 예정된 수순처럼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 강» 집필 여부를 둘러싼 스캔들이 또다시 불거져 나왔고, 그의 솔직함은 겁쟁이라는 비난으로, 이상에 대한 믿음은 매수 당한 것으로, 그 동안 스탈린을 설득하여 여러 작가와 그의 가족을 구명해 준 행동은 모두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 행동에 불과했던 것으로 치부되기에 이르렀다.





                                                          그림 8. 집필 작업 중인 숄로호프의 모습


전쟁 이후 숄로호프는 권력 세계로부터 최대한 멀어지고자 노력했고, 작가연맹의 총서기장 자리도 고사한 채 자신의 고향인 뵤셴스카야(현재 로스토프 지역)로 귀향했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사건과 그로 인한 사람들의 비난을 견디지 못했던 숄로호프는 급기야 자신의 창작 활동을 중단하고, 고향 마을로 내려가서 자신이 좋아하는 낚시로 소일거리를 삼으며 외로운 말년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여러 가지 비난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숄로호프는 글쓰기 외에도 자신이 사회와 민중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계속 고민하고 이를 실천하고자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숄로호프는 노벨상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수상과 더불어 받은 상금을 사회로 환원한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노벨상과 레닌상 수상 상금을 새로운 학교를 건설하는데 보태라며 헌납했고, 스탈린 상 수상 상금은 전선에서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는데 사용해달라며 기증했다. 그는 자신의 사후의 삶도 소박하게 준비했다. 1984년 2월 21일 지병인 암으로 사망한 숄로호프는 작은 묘비 하나 세우지 않고 자신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거주했던 돈강 유역의 작은 카자크 마을 집 앞마당에 묻혔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나이는 67세로 이미 적지 않은 나이이다. 여기서 그녀가 자신의 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지 살짝 궁금증이 든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수상 소감을 말하면서 향후 계획에 대해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얻게 되는 상금 덕분에 앞으로 적어도 10년간은 먹고 살 걱정 없이 작품 집필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며 기쁨을 표했다고 한다. 물론 그녀가 흥청망청 상금을 낭비하는 삶을 살아가진 않겠지만, 어쩐 일인지 숄로호프의 얼굴이 겹쳐서 지나가는 것은 나만이 느끼는 환영인가...

숄로호프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은 모두 전쟁을 소재로 집필되었다. 숄로호프의 경우, 서사시적인 관점을 토대로 전쟁의 폐허와 참상 속에서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을 조명해냈다. 그는 볼셰비키로 대변되는 당의 입장이 아니라, 시대의 풍랑과 역사라는 거대한 파고에 맞서는 '보통 사람'으로서 카자크 인의 삶을 그려냈다. 게다가 주인공 그레고리 멜리호프가 끝까지 볼셰비키로 돌아서지 않음으로 인해 소비에트 정부의 시각에서 바라보자면 다분히 반체제적인 색채의 작품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요한 돈 강'은 아마도 이처럼 치우침이 없는 시각,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담담한 서술로 인하여 이데올로기적 선호도와 관계 없이 보편의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스탈린의 호평까지 이끌어낼 수 있었고, 말 그대로 '칼보다 강한 펜의 힘'을 아낌없이 보여줬다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파스테르낙과 숄로호프를 둘러싸고 노벨문학상 수상을 위해 몇 년에 걸쳐 진행된 지난한 역사와 사르트르의 수상 거부 사건은 노벨문학상이 단순히 순수한 문학적 이상만을 추구하는 작품에 수여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정치적 알력과 국가 간 이익 관계로부터 결코 자유로울수 만은 없다는 점을 재확인시켜 준다. 실제로 2015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수상을 둘러싸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백러시아 간의 묘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특히 러시아의 경우, 한편으로는 실제 출신 성분(?)과 관련 없이 그녀의 작품이 자신들의 언어인 러시아어로 집필된 6번째 작품이라는 점에서 호의를 보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가 수상 전후로 러시아 정부와 벨라루스 정부 등을 상대로 발언한 다소 괘씸한 내용으로 인하여 은근하고 우회적인 흠집내기 기사도 간간히 눈에 들어오고 있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호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개인적으로는 모쪼록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향후 작품이 단순히 르포 형식의 체제 비판적이고 정치발언적인 글에만 한정되지 않고, 전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정치적 메커니즘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운 글쓰기가 되기를 희망해본다. 



 

[1]실제로 1901년부터 지금까지 수상된 총112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들 가운데에서 여성 수상자는 총 14명으로 전체수상자의12.5%에 해당한다.

[2] 네루다는 이후 1971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3] Литературная газета”. 1964. 24 октября. С. 1

[4] Maclean H. and Vickery W. The Year of Protest. New York, 1956. P. 4, 28.

[5] 1955년에는 아이슬랜드 작가 할도르 락스네스, 1956년에는 스페인의 모더니즘 시인 히메네스에게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광이 주어졌다. 락스네스의 경우, 1930년대에 소비에트 연방을 두 차례 방문하고, 심지어 스탈린 사후인 1953년 10월에도 소비에트 연방을 방문한 다분히 사회주의적인 경향이 강한 작가였지만, 노벨상을 수상한 이후 부르주아 진영의 비평에서 해방되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게 된다.

[6] Maclean H. and Vickery W. The Year of Protest, 1956. Р. 3.

[7] Guerney B. An Anthology of Russian Literature in the Soviet Period from Gorki to Pasternak. New York, 1960. P. XXII

[8] Slonim M. Russian Soviet Literature: Writers and Problems. New York, 1964. P. 228, 230

[9] 솔제니친과 사하로프에 관한 소비에트 작가 그룹의 편지 (1973년 8월 31일, 프라브다). https://ru.wikipedia.org/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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