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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산수(山水)를 품다 – 중국의 정원
분류전통문화
국가 중국
날짜2015-09-10
조회수2,185
첨부파일

산수(山水)를 품다 – 중국의 정원

 

이영섭
중앙대 외국학연구소
HK사업단 HK연구교수

18세기 조선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자신만의 정원(庭園)을 갖는 것이 유행이었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이 같은 유행은 당시 갈수록 치열해지는 당쟁(黨爭) 속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해 그 속에서 안거(安居)하고자 했던 사대부들의 바람이 현실화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정원에 대한 열망과 유행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중국으로부터의 영향이 가장 컸다. 우선적으로 송명이학(宋明理學)에서 숭상해마지 않던 도연명(陶淵明)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만의 화원(花園)에 은거한 일화가 초연한 선비의 상징이 되었던 까닭도 있었지만, 동시에 실질적으로 송대(宋代) 이래로 점차 유행하기 시작한 중국 사대부들의 개인 정원 소유가 명청대(明淸代)에 이르러 극성하게 되면서, 조선에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같이 우리나라 조선시대 정원에도 큰 영향을 끼친 중국의 정원(庭園)은 어떤 모습에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었을까? 우선 언급하고 넘어 갈 것이 ‘중국의 정원’이란 말은 역사적으로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왜냐하면 ‘정원’(庭園)이란 표현은 근대 일본에서 등장한 조어(造語)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주로 ‘원림’(園林)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일단 ‘원림’은 ‘정원’보다 좀 더 포괄적인 의미이다. 그래서 개인적인 정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송대 이전까지는 주로 ‘원림’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좀 더 적절하다. 
원림의 기원은 고대 중국, 그러니까 상(商)나라나 주(周)나라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원림은 주로 ‘원유’(苑囿)라고 불렸는데 천자(天子)를 위한 넓은 사냥터였다. 하지만 전국시대(戰國時代) 이후 신선사상이 대유행을 하게 되고, 진(秦)나라나 한(漢)나라 황실(皇室)에 의해 숭상되면서, 원림은 불로장생하는 신선세계에 대한 동경을 담은 선경(仙境)을 재현하는 데에 그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그래서 궁궐 안에 대규모로 신선세계를 모방하거나 상징하는 건축과 조경(造景)이 구축되었는데, 당시 이 같은 원림은 주로 ‘궁원’(宮苑)이라고 통칭되었다. 명칭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궁원’이란 기본적으로 임금을 위한 공간의 성격이었다. 가장 유명한 것이 한(漢) 무제(武帝) 때 지어진 ‘상림원’(上林苑)이다.
한나라 무제는 진(秦)나라 때의 궁원(宮苑) 터에 대대적인 공사를 진행해 상림원을 완성했다. 너비가 종횡으로 300리(약 120km)에 달할 정도였다고 전해질 정도로 대규모였다. 지금은 그 진면모를 직접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 안에는 신선이 사는 섬이나 산수자연을 상징하는 갖가지 건물과 연못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국내외에서 헌상(獻上)한 기기묘묘한 꽃과 나무, 그리고 짐승들로 가득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마치 제국주의 시기의 영국과 프랑스의 박물관이 그들이 침략했거나 아예 식민지로 삼은 지역에서 가져온 ‘전리품’(戰利品)들로 가득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으리라. 이 같은 장관을 장황한 미사여구로 묘사한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상림부(上林賦)」도 전한다. 그런데 「상림부」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양한 건물, 동물, 식물들과 함께, 사냥에 나서는 무제의 위용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를 보면 이때까지도 당초 ‘원유’(苑囿)가 가졌던 사낭터로서의 기능 역시 함께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명(明)나라 때 그려진 <한무제상림출렵도(漢武帝上林出獵圖)> 부분
이 그림은 사마상여의 「상림부」에 기술된 묘사를 따라 그려진 것인데,
위 장면은 한무제가 상림원에서 사냥에 나서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상림원’은 이후 진시황의 아방궁(阿房宮)과 함께 호화로운 건축의 대명사가 되어서, 중국의 최고급 아파트 단지나 식당의 이름 중 ‘상림원’이란 칭호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규모나 성격 면에서는 판이하게 다르지만, 우리나라 역시 조선시대 창덕궁(昌德宮)의 어원(御苑)을 상림원이라 명명한 바가 있다.
이 같은 조류는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를 거치면서 현학(玄學)이나 서역의 여러 문화적 영향을 더해, 보다 고상하고 심미적인 원림을 추구하게 된다. 당시 대표적인 황실의 원림으로는 남조 양나라의 간문제(簡文帝)의 화림원(華林園)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대부호들에 의해 본격적인 사설 원림도 등장하게 되는데, 진대(晉代)에 황실의 부(富)를 능가했다고 알려진 대부호(大富豪) 석숭(石崇)의 금곡원(金谷園)이 그 대표이다.
    명나라 구영(仇英)의 <금곡원도(金谷園圖)> 일부

하지만 이 같은 원림들은 거의 모두가 높은 지위에 있거나 엄청난 재산을 소유한 이가 대규모의 공사를 통해 지은 것들도,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정원과는 규모나 성격에 있어서 사뭇 차이가 있다. 물론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개인 사저(私邸) 성격의 정원은 이때에도 존재했겠지만 지식인들이 의식적으로 원림을 소유하고 이름을 붙이는 시도는 송대에 이르러서야 보편화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당나라 때에도 지식인들에게 이미 백거이(白居易) 같은 경우 지극히 소박하고 초라하지만 자신이 깃들어 사는 초당(草堂)을 아꼈고, 산수자연이 빼어난 망천(輞川)에 살던 왕유(王維)는 자신의 사는 망천별업(輞川别業)을 중심으로 주변의 자연풍경과 건물을 노래한 시를 많이 남겼다. 하지만 이 같은 경우는 대부분이 자신만의 원림을 만들어서 이를 전유(專有)하는 것이 아니라 산수자연이 좋은 곳에 스스로가 어우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명나라 구영의 <망천십경도(輞川十景圖)>의 일부

하지만 송대에 이르러서는 황실이나 대부호의 원림 말고도, 지식인, 이른바 사대부(士大夫)의 개인 정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황실이나 고관대작의 원림은 궁궐처럼 규모가 매우 큰 건축에 가까우므로 더이상 논하지 않고, 여기서는 지식인들이 개인적으로 지었던 정원에 대해 집중하도록 하겠다.
송대에 이르면 과거에 비해 직접적인 산수(山水)보단 그 산수를 받아들이고 표현하려는 지식인의 의경(意境)을 강조하는 설계가 유행하기 시작한다. 진한(秦漢)시대 이래로 황실의 원림은 ‘일지삼산’(一池三山: 하나의 연못에 세 개의 산. 이는 먼 바다 위에 신선이 산다는 세 산, 즉 영주산(瀛洲山),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을 의미)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지만, 지식인들의 개인 정원은 각자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이나 상징을 원림의 테마로 삼는 것이 대부분 이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명한 송대 원림으로는 유명 시인이었던 소순흠(蘇舜欽)이 만든 창랑정(滄浪亭)이 있다. 이는 원래 과거 왕공(王公)이 지었던 화원(花園)을 고쳐서 자신의 정원으로 만든 것으로, 아직까지도 고풍스러우면서 기품 있는 정원으로 이름이 높다.

 
                                      창랑정(滄浪亭)의 겨울 풍경

명청대에 들어 개인 정원은 바야흐로 극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실제로 명나라 중엽부터 청나라 중엽까지 정원의 수가 급증해, 강남(江南: 주로 장강 이남의 세 행성(行省), 즉 강소성(江蘇省), 절강성(浙江省), 안휘성(安徽省)을 가리킴)의 대표적인 도시 중 하나였던 소주(蘇州) 한 곳에만 개인 정원이 200여 곳에 달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 같은 발전을 보다 확실하게 확인시켜주는 것은 명말청초(明末淸初) 계성(計成)이 지은 『원야(園冶)』의 출간이다. 계성은 이 책을 1631년 완성하여, 1634년에 출간했는데, 정원 조성의 이론과 설계에 대해 포괄적으로 논의가 담겨있다.

               실제로 『원야』를 보면 이론뿐만 아니라 창틀 무늬 같은
           아주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서까지도
다양한 예를 들어 주고 있다.

이 책의 출판은 당시 정원의 조성이 얼마나 이론화, 체계화되었으며, 정원을 설계하는 전문가들이 이미 등장해 있었다는 것을 방증해 준다. 앞서 지적했듯이 계성의 정원 조성에 대한 관점은 기본적으로 남종화(南宗畵)의 등장과 맥락을 같이 하는 사대부 중심의 관점이었다.(남종화에 대한 설명은 「문인화의 기원」 참고)
당시의 정원은 기본적으로 ‘작은 공간에 넓디넓은 산수를 담는다’(小中見大)는 원칙 아래, 기암괴석을 사용한 가산(假山: 산을 상징하는 바위)과 굽이지며 이어지는 길, 그리고 연못이 필수였다. 특히 가산의 재료로는 태호(太湖)에서 나는 태호석을 최고로 쳤다. 태호석은 석회암 재질에 오랜 기간의 침식작용으로 인해 돌 사이사이에 갖가지 구멍과 골이 나 있어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산을 상징하는 데에 안성맞춤이었다.


                        태호석으로 만들어진 소주(蘇州) 사자림(獅子林)의 가산(假山)들

이 같은 태호석에 대한 기호(嗜好)는 조선에도 전파되었다. 단적인 예로, 정조(正祖)의 「태호석기(太湖石記)」(『홍재전서(弘齋全書)』권4 중 『춘저록(春邸錄)』에 수록)이란 글을 보면 정조가 태호석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이를 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조선의 경우 큰 태호석을 가져와 정원을 짓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 했기에, 주로 수석(壽石)의 형태로 태호석을 감상하는 것이 유행했다. 조선시대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유심히 살펴보면 곳곳에 태호석이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명청대의 강남의 정원들은 당초 황제들이 불로장생의 신선세계를 지향하며 만들어낸 ‘일지삼산’(一池三山)의 구조와는 상관없이, 강남 지식인들의 이상과 바람을 투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 머물지 않고 이 같이 정원 안에서 만들어낸 상징적인 경치가 외부의 실제 경치와도 어울리는 것을 매우 중시했다. 이처럼 내부의 경치를 외부의 실제 경치와 어울리게 해서 상승효과를 이끌어내는 조경 기술을 ‘차경’(借景), 즉 ‘경치를 빌려오는 기술’이라고 불렀다. 


              졸정원(拙政園)의 차경(借景)
졸정원의 풍경을 살피면 시야에 높다란 북사탑(北寺塔: 76미터)까지
아련히 들어오면서 종횡대비의 조형감을 준다.

중국 강남의 전통 정원에서 특히 눈여겨 볼 것은 시선의 처리이다. 즉 굽이진 길이나 가로막힌 담장의 창동(窓洞)과 문동(門洞)을 통해, 정원을 거니는 사람의 시선을 인위적으로 이끌어내고 제한한다. 예를 들어 중국 전통 정원의 인위적으로 굽이진 길의 경우, 찬찬히 그 길을 따라 거닐다보면, 일정한 거리마다 몸을 약간씩 돌리게 되면서 자연스레 시선도 약간씩 돌아가게 되는데, 그때그때 눈에 들어오는 경치가 미묘하게 변화하게끔 설계되어 있다.
이 같은 명청시기 개인 정원의 발전은 심지어 당초 중국 정원의 기원이었던 황실 정원에까지 역으로 영향을 끼칠 정도가 되었다. 그 단적인 예로 청나라 건륭제(乾隆帝)는 일생동안 여섯 차례나 강남의 순행(巡幸)했는데, 그때마다 화가들에게 강남의 이름난 정원을 그려오게 한 뒤, 이를 자신의 정원인 원명원(圓明園) 안에서 이 그림들을 기초로 강남 정원들을 모방해 정원을 조성하게 했다. 전해지는 바로는 특히 해녕(海寧)의 우원(隅園: 이후 건륭제가 하사한 '안란원'(安瀾園)이란 이름으로 개명), 강녕(江寧)의 첨원(瞻園), 항주(杭州)의 소유천원(小有天園), 소주(蘇州)의 사자림(獅子林)의 모습을 모방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명청시기 강남에서 극성했던 정원 문화는 청나라에 이르러 유럽에까지 전해져 영향을 끼치게 된다. 기본적으로 유럽의 정원은 고대 그리스로부터 르네상스를 거치며 완성된 기하학적 설계와 안정적인 균형과 대칭을 특징으로 하는 ‘정형식 정원’(Formal garden)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18세기 들어 비대칭적인 중국의 정원 형태가 전해지면서 기존의 ‘정형식 정원’이 아닌 ‘풍경식 정원’(landscape garden)이 등장한다. 중국과 가장 활발한 교류를 시작했던 영국이 자연스레 이 같은 새로운 정원 형식을 가장 먼저 받아들였기에, 일반적으로 ‘풍경식 정원’을 ‘영국식 정원’이라고 부르고, 기존의 정원 전통을 잘 계승하고 있던 나라가 프랑스였으므로 ‘정형식 정원’을 ‘프랑스 정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후로 ‘풍경식 정원’은 유럽 각지로 전파되어서 ‘정형식 정원’과 ‘풍경식 정원’이 함께 사용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네덜란드 헤트루 궁전의 정원
                    이 정원은 기하학적 무늬에 대칭과 균형을 중시하는 전형적인 정형식 정원이다.

 
                                         독일 슈베찡엔 궁전의 풍경식 정원
            슈베찡엔 궁전의 정원을 보면, 안쪽은 프랑스 로코코 양식을 따른 정형식 정원이지만,
                   그 주위는 대칭과 균형으로부터 자유로운 풍경식 정원으로 감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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