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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문인화의 기원
분류전통문화
국가 중국
날짜2015-08-17
조회수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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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화의 기원


이영섭
중앙대 외국학연구소
HK사업단 HK연구교수

흔히 ‘동양화’하면 떠올리는 그림은 어떤 그림인가? 일단 ‘동양화’란 표현 자체에 문제가 좀 있다. 굳이 풀자면 ‘동양 스타일의 그림’ 정도의 의미일 텐데, 여기서 ‘동양’이 범위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이를 명료하게 하기 위해 거칠게 표현하지면 오히려 ‘중국화’(中國畵)가 좀 더 정확한 표현이다. 이러한 중국화의 영향으로 구축된 전통 한국화나 일본화까지도 소위 ‘동양화’에 포함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동양화 중에서도 현재 사람들이 ‘동양화’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물론 다양한 그림 양식이 존재하긴 하지만, 아마도 대부분이 수묵화, 그 중에서도 산수화 아니면 사군자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결과는 이러한 방식의 그림이 가장 동양의 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형체를 그대로 담아내려는 노력이 아닌 선비의 정신을 오롯이 표현한 수묵화를 가장 동양적이면서도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동양화의 전통으로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현재 인식을 역사적 사실과 대조해 보면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실제로 수묵화, 그 중에서도 특히 선비의 정신을 오롯이 표현한 수묵화를 뜻하는 소위 ‘남종화’(南宗畵)나 ‘문인화’(文人畵)는 명나라 말기에 동기창(董其昌: 1555-1636) 등의 주도로 그 개념이 확립되었다. ‘남종화’(南宗畵)란 표현 자체가 형체를 그대로 그리려는 ‘북종화’를 상대로 정신을 표현하는 남종화가 본질적인 우위에 있음을 강조하려는 구분이었고, ‘문인화’(文人畵) 역시 직업으로 남의 눈에 들기 위한 그림을 그리는 ‘환쟁이’의 그림과 대비되는 선비들의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를 담은 순수한 그림이란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구분이었다. 

  
물론 개념보다는 실체가 앞서는 법이라, 남종화나 문인화란 개념이 정착되는 명나라 말엽 이전부터 수묵화는 싹을 틔워 발전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선비들에게 전폭적으로 선비의 그림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아무리 이르게 잡아도 원(元)나라 때의 시(詩), 서(書), 화(畵)로 유명했던 조맹부(趙孟頫: 1254-1322)가 제창한 그림에는 ‘선비의 기운’(士氣)이 담겨야지 기교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나 같은 도구(종이, 붓, 먹 등)을 사용하는 서예와 그림은 사실 그 기원이 같다는 서화동원론(書畵同源論)이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부터다.
 

혹자는 위의 그림을 보고 채색이 들어갔으므로 수묵화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채색화와 수묵화의 구분은 채색의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먹이든 물감이든 그 농담(濃淡)과 번짐, 그리고 필선을 위주로 그렸다면 수묵화이고, 먹이든 물감이든 색을 칠하듯이 그렸으면 채색화가 된다.
아래 보이는 두 폭의 그림이 대표적인 채색화이다.

물론 수묵화가 명나라 때 이 같은 성취를 거두게 된 것 역시 북송(北宋) 말 소동파(蘇東坡)로 더 유명한 소식(蘇軾: 1037-1101)이나 묵죽(墨竹)으로 유명한 문동(文同: 1018-1079) 같은 선비들이 제창한 수묵화의 화론(畵論)을 계승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소식은 「서언능왕주박소화절지(書鄢陵王主薄所畵折枝)」 제1수에서 이렇게 읊조렸다. 

그림을 논할 때 형체가 비슷한지 안 한지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 식견은 이웃집 어린 아이의 눈높이와 같은 것일세.
……
시와 그림은 본래가 한 몸이기에,
천연(天然)의 조탁과 깔끔하고 참신함을 갖춰야하네.
論畵以形似, 見與兒童鄰.
……
詩畵本一律, 天工與淸新.

이는 시와 그림을 하나로 간주하면서 형체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다시 말해 시가 타고난 심성을 표출하는 바이기에, 그림 역시 형체를 그리는 데에 집착해서는 안 되고, 자신만의 타고난 심성을 잘 표현해야만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이 당시의 선비들에게 아주 폭넓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보다 확실한 방향성을 확보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고, 궁극적으로 원나라 때에 이르러 수묵화의 번성을 이끌어 내었고 명나라에 이르러 ‘문인화’나 ‘남종화’라는 확실한 정체성을 확립하게끔 해 주었다.

 

비록 실제 그림으로 실천은 하지 못했지만, 이 같이 형체를 무시하고 담긴 뜻을 중시하는 경향은 북송 초기 구양수(歐陽修)가 지은 「반거도(盤車圖)」란 시에 이미 보인다. 

옛 그림은 표현하고자 하는 뜻을 그렸지, 형체를 그리지 않았네.
古畵畵意不畵形. 

물론 이 같은 지적은 당시의 관념을 옛 그림에 투영한 것일 뿐 사실이 아니다. 최소한 육조시기(六朝時期) 까지는 그림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미학적인 관념상 확실히 ‘형사’(形似), 즉 형체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중시하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관념의 발달로 “형체를 살펴 그 안에 담긴 정신까지 얻는 것”(瞻形得神)을 최고의 경지로 삼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정신을 얻기 위해서라도 형체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대상이었다. 당시의 이러한 미학적 관념은 그림에 있어서도 정교한 채색화(彩色畵)를 추종하게끔 만들었고, 수묵화 같은 표현기법은 아직 싹을 틔울 수 없었다.

그러나 “형체는 버리고 뜻만 얻는 것”(亡形得意)을 중시하는 미학적 관점이 유행하게 되는 당(唐)나라에 들어 드디어 수묵화를 상상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이때에 이른바 수묵화의 시조라고 불리는 왕유(王維: 692-761)가 등장한다. 그는 21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비록 좌천당하기도 하고 안록산(安祿山)의 난(亂) 때 안록산에게 부역(附逆)한 일로 궁지에 몰리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승상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말년에는 은퇴하여 망천(輞川)이란 곳에 은거했다. 그는 특히 말년에 불교(佛敎)에 심취했기에 자연스레 그의 시 곳곳에도 불가(佛家)의 가르침이 녹아있었고, 이로 인해 결국 그는 시불(詩佛)이라 불리게 된다. 그는 시와 함께 그림에도 능했는데 시에서는 회화적 묘사를 사용하고 그림에서는 시운(詩韻)까지 담아내어 후세 사람들에게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는 칭송을 받았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왕유가 당나라를 대표하는 전원시인(田園詩人)인 동시에 남종화(南宗畵)라 일컬어지는 문인화(文人畵)의 시조로도 추앙받고 있다는 점이다. 요지인즉, 왕유가 세밀한 묘사와 채색(彩色)을 위주로 하던 기존의 화풍과 달리 의경(意境) 함축과 수묵(水墨)을 위주로 하는 새로운 화풍(畵風)을 개창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앞서 밝혔듯이 명나라 말에 이르러 이러한 수묵화를 남종화라 규정지으며 그 권위를 강화하고 동시에 채색화를 북종화(北宗畵)로 규정하고 폄하하기 위해 등장한 일종의 설정이기에, 다분히 과장이 섞여있다. 비록 당시 왕유가 갓 싹을 틔우려는 수묵화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본격적인 수묵화의 시작은 송나라 이후로 보아야 한다.
그럼 왕유의 그림을 살펴보자. 

 

왕유의 「복생수경도(伏生受經圖)」는 전형적인 채색화 형식이다. 이에 비해 「강간설제도(江干雪霽圖)」는 확연히 수묵화의 풍모를 갖추고 있다.(물론 「강간설제도」는 왕유의 진적(眞迹)이 아니라 후대 사람의 모작(模作)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모작이란 원작을 최대한 베끼는 데에 목적이 있으므로, 그래도 어느 정도 원작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당나라 때까지도 전반적으로 지식인에게 그림이란 기예 자체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당나라 초기 문신(文臣)이자 화가였던 염립본(閻立本: 601-673)의 일화이다.(이 이야기는 『신당서(新唐書) 』권100 「염립본전(閻立本傳)」에 보인다.) 

당초 당 태종은 여러 신하들과 춘원지(春苑池)에 배를 띄워 놀다가, 신기한 새가 가만히 물결 위에 떠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 새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주위의 신하들에게 그 새에 대한 시를 짓게 하고 염립본(閻立本)을 불러서 그 새의 형상을 그리게 했다. 황명(皇命)으로 그를 부르는데, “화사(畵師) 염립본(閻立本)”이라고 호칭했는데, 당시 그는 이미 주작낭중(主爵郎中)을 지내고 있을 때였다. 불려온 염립본은 춘원지 왼편에 엎드려 붉은 안료를 갈고 핥으며 그림을 그렸다. 그가 저쪽에 점잖게 앉아서 시를 짓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스스로가 너무 부끄럽기고 서글퍼져서 식은땀을 흘렸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아들들을 불러 모아 이렇게 훈계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성현의 책을 읽었고, 문장 역시 남들보다 못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유독 그림으로 이름이 나다보니 종놈과 같은 대접을 받고 말았다. 너희들은 삼가 그림을 익히지 말거라!” 그러나 염립본(閻立本)은 천성적으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남에게 비방을 들으면서도 그림 그리기를 그만 두질 못했다.
初, 太宗與侍臣泛舟春苑池, 見異鳥容與波上, 悅之, 詔坐者賦詩, 而召立本侔狀. 閤外傳呼畵師閻立本, 是時已爲主爵郎中, 俯伏池左, 研吮丹粉, 望坐者羞悵流汗. 歸戒其子曰: “吾少讀書, 文辭不減儕輩, 今獨以畵見名, 與廝役等, 若曹愼毋習!” 然性所好, 雖被訾屈, 亦不能罷也.

당시까지도 그림은 모두 채색화였고, 일반적으로 그림이란 직업 화가, 즉 환쟁이나 그리는 잔재주였다. 물론 사회적 지위를 갖춘 이들 중에서 염립본처럼 타고난 기호가 그림 그리기인 이들도 있었겠지만, 주작낭중(主爵郎中)이라는 종5품(從五品) 벼슬에 오른 이가 ‘화가’로 불리고 황제의 명으로 그림을 그린 것을 일생의 수치로 여길 만큼 그림이라는 기예의 지위는 낮았던 것이다.

 

전통적으로 중국 지식인들이 대외적으로 자신의 품격과 수양의 정도를 나타내는 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것은 바로 『시(詩)』였다. 이후로도 『시』를 외우거나 스스로 시를 짓는다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후한(後漢) 시기 들어 서예가 지식인의 중요한 덕목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육조시기 들어서는 서성(書聖)이라고 불리는 왕희지(王羲之)의 활약으로, 서예는 이미 지식인들이 열광하는 필수적인 기예가 되어 있었고, 당나라 때에는 서예에 대한 열풍이 더더욱 강렬해졌다.

이런 와중에 그림 역시 점차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그 지위를 상승시키기 위한 정의가 시도되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이미 충분히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지식인의 덕목인 ‘시’나 ‘서예’와 ‘그림’과의 친연 관계를 설정하여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가듯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첫 시도는 아무래도 위(魏)나라 조식(曹植)의 「화찬서(畵贊序)」일 것이다. 「화찬서」에서 조식은 “그림이란 조서(鳥書)의 부류일 것”(蓋畵者, 鳥書之流也)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다분히 억지이긴 하지만, 모두가 그림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을 때, 그림을 서예에서 쓰이는 고서체(古書體) 중 하나인 조서(鳥書)와 연계하여 그 가치를 상승시키려 했던 시도였다.
보다 본격적인 시도는 당(唐)나라 중기(中期)에 보인다. 장언원(張彦遠)이 지은 『역대명화기(歷代名畵記)』 「서화지원류(서화지원류)」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표현이 보인다. 

창힐(蒼頡)은……새나 거북이의 발자국을 나란히 놓고 보다가 글자의 형태를 확정지었다.……이때에는 글씨와 그림은 한 몸으로 분리되지 않았었다.
頡……因儷鳥龜之跡, 遂定書字之形.……是時也, 書畵同體而未分

이는 서예와 그림의 기원이 같다는 이른바 ‘서화동원설’(書畵同源說)이다. 위나라 조식의 주장에 비해 보다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설정이며, 이 같은 주장은 그 외연을 끊임없이 확장해가면서 원(元)나라의 조맹부(趙孟頫)나 명(明)나라의 동기창(董其昌) 때까지 줄기차게 지속된다.
또한 왕유를 두고 “왕유의 시를 음미해 보면, 그 시 속에는 그림이 있고, 왕유의 그림을 보면, 그 그림 속에는 시가 있다”(味摩詰之詩, 詩中有畵, 觀摩詰之畵, 畵中有詩)라고 한 북송(北宋) 말 소식(蘇軾)의 표현은 그림과 시가 공통된 하나의 틀 안에 존재하는 기예임을, 다시 말해 ‘시화일률관’(詩畵一律觀)을 주장하고 있다.
결국 전통적으로 지식인에게 그 가치를 인정받던 시와, 후한시기부터 지식인에게 본격적으로 주목 받게 된 서예와, 당송(唐宋)시기의 맹아기(萌芽期)와 성장기(成長期)를 거쳐, 원명(元明)시기 만개(滿開)하게 되는 수묵화 기반의 그림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중국 지식인의 덕목으로 이른바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상당히 유구한 시간에 걸쳐 복잡다단하게 변천을 거듭해온 중국 수묵화의 역사를 상당히 거칠고 단순하게 정리해 보았다.(사실 여기서는 편의를 위해, 이른바 '사대부'(士大夫)로서의 당시 지식인들의 정체성 확립, 선종(禪宗)이나 이학(理學)의 영향, 종이와 먹과 같은 그림 도구의 질적인 변화 등 수묵화의 지위 상승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들을 과감하게 생략했다.)
총괄해 보면, 우리가 현재 동양화의 정수 혹은 본체 정도로 여기는 수묵화는 북송시기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해 원명시기에야 비로서 보편화된 그림 형식으로, 그 역정(歷程)은 그림이 중국 지식인에게 환쟁이의 잔재주에서 지식인으로서 필수적으로 갖춰야할 덕목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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